11월인데도 여전히 이어지는 가을의 정취를 만나기 위해 문수산에 올라 문수사에 들렀습니다.

푸른 나무들의 집인 숲에는 단풍이 들어 가을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가을이 바글거리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기록적인 무더위에 산고(産苦)를 치른 뒤라 싱그러운 생명체들이 오랜만에 기지개를 활짝 펼칠 기세입니다.

가을 기운이 만연하게 일어나는 산길을 걷자니 기분까지 근엄해집니다.

들머리는 율리농협 뒤에서 출발해 망해사를 거쳐 영취산으로 오르는 코스로 잡았습니다. 평일인데도 산을 오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산책 삼아 나왔는지 배낭도 스틱도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산을 오르는 모습이 평온해 보입니다. 이정표 안내에 따라 산길에 접어듭니다.

태고종으로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에 의하면 헌강왕(875~886 재위) 때 창건했다고 했습니다.

헌강왕이 개운포에 놀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휩싸이니 일관이 아뢰기를 동해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행하면 곧 풀릴 것이라고 하므로 왕은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했습니다.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동해용이 7명의 아들과 함께 나타나 임금의 덕을 찬양하고, 아들 1명을 임금의 정사를 보좌하도록 했다는 설화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절은 1962년 영암이 중창했습니다.

망해사지 승탑의 연화석(蓮花石)에는 8개 복련을 조각했습니다.

위는 4단의 굄을 두어 받도고 있었으며, 탑신에는 우주를 새겼고 상륜부는 없어졌습니다.

이 부도는 파손되었던 것을 1960년에 복원했으며, 9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쉬어가라 유혹하는 성소를 지나 힘을 내어 올라 영취산(352m)에 들렀습니다.

불교 성지를 암시해 주는 영취산 명칭에서 전해오는 전설을 음미했습니다.

신라 최초 승려인 낭지대사와 지통법사의 행적이 있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머문 산입니다.

영축사·망해사·문수사·청송사 등이 있었기 때문에 울산의 불교 성지라고 일컫습니다.

또 문수산 이름이 원래 영취산이라 하다 조선 시대에 이름이 바뀐 것도 그렇습니다.

울어대는 까마귀의 서러움과 소슬하게 부어오는 가을바람, 나무들의 집 숲속으로 접어듭니다.

작은 욕심 하나도 보물처럼 움켜쥐고 있는 참으로 초라한 나를 데리고 말입니다.

그래도 바람을 앞세워 나뭇가지를 흔들어 내는 소리로 침입자를 경계하는 산을 조심스레 오릅니다.

직선과 곡선을 반복하며 이어지는 호방한 산길을 걷는데 기분이 상쾌해져 옵니다.

바람 소리를 이용해 들려주는 나무들의 감동적인 고해를 들으며 사색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위대한 대자연과 정서로 하나가 되어 내 안의 번민과 아픔을 치유받기 시작합니다.

걷기는 ‘천년의 치료법’이라 누군가 설파했던가요.

현대인은 마음속에 좋지 않은 감정이 함몰되어 감정이 폭발하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활한 소통 단절로 스스로 자신을 갇혀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등산은 나 자신과 자연이 소통하는 통로여서 오르기만 해도 치유해 주는 최고의 의사이지 싶습니다.

산세가 맑고 깨끗해 문수보살이 살았다는 신령한 문수산 중턱까지 도달했습니다.

훌륭한 복덕을 지녔다는 뜻이 있고,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있어 영험한 명산입니다.

실제로 울산의 도심의 허파요 바라만 봐도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태화강이 휘감고 돌아 동해로 흘러가는 문수산, 영취산(340m)과 남암산(543m)을 품고 있어 포근함이 느껴집니다.

화려함보다 삶에 활력을 주는 평온을 주는 산입니다.

걸음을 재촉해 깔딱 고개 전까지 평탄한 등산을 했습니다.

정상까지 0.7km, 가파른 길이 이어지고 나무계단을 올라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고초를 겪어야 비로소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 등산의 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불심을 자극하는 돌탑과 문수보살의 기가 나올 법한 해발 600m 문수산 정상 비석 앞에 섰습니다. 이 산은 원래 영축산이라 불렀습니다.

인도의 영축산은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곳이며, 신선들이 살았고 독수리가 많이 있으므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조선조에 문수산이라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옵니다. 또 청량산이라 했는데 청량면 유래가 되었습니다.

산 아래에 펼쳐지는 울산 시내의 풍경이 역동적입니다. 정상에 서서 울산에 내리기 시작하는 가을의 진면모를 지켜봤습니다.

한량이 되어 만끽해 본 가을은 내 서정을 살찌우며 느린 속도로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가 꽃을 바치는 ‘옥녀 헌화형’ 명당 문수사로 내려섭니다.

남암산이 왼팔을 가지런히 하고 서 있고, 오른팔을 뻗어 문수산에 무언가를 전해주는 모양새입니다.

울주문격인 대나무밭을 지나 문수사에 내려섰습니다. 절벽에 축대를 세워 지은 문수사의 풍수는 낭떠러지 바위 위에 제비가 집을 지은 듯한 ‘연소형(燕巢形)’이라 재물과 액땜, 건강, 장수 명당이라 했습니다.

고려 때는 라마교의 전당으로도 불렀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문수보살이 계신 이곳인 문수사 법당에 들어갔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문수보살 성지(聖地)'의 유래를 전해오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신라 원성왕 때 연회 스님이 토굴에 은거하면서 수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연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원성왕이 사연을 듣고 스님을 국사로 봉하려고 하자 스님은 짐을 싸서 길을 떠났습니다.

가는 도중에 문수보살과 변재 처녀를 만나 인연을 어길 수 없음을 깨닫고 국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 스님은 문수보살을 만났던 곳에 암자를 지어 '문수암'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유래로 인해 문수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문수보살이 항상 머문다고 전해졌습니다.

특이한 점은 문수사에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이 없습니다.

범종각 밑이 경내로 드나드는 유일한 문인 셈입니다.

문수사는 1300년 전 신라 연희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당시에는 조그마한 암자였다고 합니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가 절을 세워 문수사라 했습니다.

그 후 범어사의 말사가 되면서 문수암이라 했다가 1989년에 중건하여 다시 문수사라 불렀습니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입니다.

범종루에는 1987년, 롯데 신격호 회장의 시주로 조성한 범종이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대웅전도 1982년 신회장 시주로 신축되었습니다.

문수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이 신령합니다. 1787년 정조 11에 만들어진 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28.3cm, 어깨너비 12.6cm,

머리 높이 10.5cm, 무릎 너비 15.3cm의 작은 불상입니다.

여래상의 얼굴이 턱 쪽으로 약간 각이 져 있으나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법의(法衣)는 가슴을 가리는 승기지(僧祇支)이고, 바지는 군의를 입었습니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올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무릎 위에 두었습니다.

문수사는 1999년부터 등산객을 상대로 점심을 공양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앞에는 법당과 연결한 유리 막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법회 때 대웅전 밖에서 비바람과 추위에 떠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사찰 건물은 대웅전, 범종각, 산신각, 종무소, 요사채가 있습니다. 산신각 뒤에는 화강암으로 제단을 쌓고 모신 대형 불상이 있습니다.

문수사에서 나와 가파른 벼랑길을 내려섭니다. 돌아보니 산 중턱 바위에 놓인 신령한 절집이 위태해 보입니다.

거대한 바위 벼랑에 제비집을 지어 놓은 문수사에 불경 외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 해당 내용은 '울주 블로그 기자'의 원고로 울주군청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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