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용인시 SNS 시민 서포터즈가 취재한 기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용인시 SNS 서포터즈 정성묘입니다.

지난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스승의 은혜에 대해 생각하고 보답하는 날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스승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을 지나다 보면

빽빽한 아파트 단지 사이로

예스러운 풍경이 나옵니다.

정암 조광조(1482~1519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심곡서원’입니다.

정암 조광조 선생과 선생을 모시는

심곡서원에 대해 소개합니다.

심곡서원은 조선 후기 중종 때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효종 원년(1649년)에

설립한 사원입니다.

정암 조광조 선생은 유교 사림파의 수장으로

급진적인 개혁 정치의 대표적인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중종반정 후 새로운 인물이 필요함에 따라

발탁된 인물로 중종의 신뢰 속에서

유교적 이상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타협하지 않은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펼치다

안팎의 많은 비판 속에 주초위왕,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나뭇잎 글씨로 모함을 받는 일화로 유명한 기묘사화

중종 14년(1519) 12월 사약을 받고 죽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광조 선생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한국의 도학 및 실천 유학의

시초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그를 모범으로 따랐습니다.

37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했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요,

정치가로서 이상적 모델이 되었습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

소학과 향약의 보급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특히 조광조 사후에도 서원은 향약과 함께

사림파의 기반을 튼튼히 하여 선조 때에 이르러

사림파의 세상이 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서원은 성균관, 향교와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교육 기관으로,

국립으로 전국 각 도시에 분배된 향교와 대비되는

사립 학교로서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습니다.

서원은 교육 기능과 교화 기능을

그 양 축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조선 중기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를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합니다.

심곡서원은 그중의 하나로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시

조광조를 모신 서원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현재 존속되고 있는 서원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1605년 건립되어 1650년 효종으로부터

‘심곡서원’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은 사액 서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국가 지정 문화재 대한민국 사적

제503호인 심곡서원입니다.

병풍처럼 펼쳐진 아파트 아래에 위치한

심곡서원은 입구의 홍살문을 시작으로

내삼문, 외삼문, 강당인 일소당, 사우(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교육 기능을 하는 강당이 전면에 위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우(사당)이 뒤쪽에 배치된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입구의 홍살문을 시작으로

세 칸의 솟을 대문으로 이루어진 외삼문이 나옵니다.

외삼문 아래 신미삼월 즉 1931년 3월에 제작된

심곡서원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강당이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강당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로 되어 있습니다.

각 칸의 문마다 판자문비를 달아

사방을 모두 열어 개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서원 설립의 일차적 목표교학이었으므로

강당과 기숙사 역할을 하는 동재서재

건축적으로 완성도가 제일 높았습니다.

강당에서의 행사를 제외하고는 항상 머물며

공부하는 곳이었습니다.

좌측에는 거인재, 우측에는 유인재라고 하는

유학생들이 숙식했던 동재와 서재 건물이 나옵니다.

서재인 거인재에는

인자함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연장자인 유학생들이 살았고

동재인 유인재

의로움이 쉬는 곳이라는 뜻으로

어린 유학생들이 기숙했다고 합니다.

사우(사당)을 보호하고 있는 내삼문이 나옵니다.

내삼문 옆으로는 장서각이 있습니다.

일종의 교육 지원 시설로 서적 및 목판의 간행,

수집, 보관 등을 위해 지어진 건물입니다.

67종 486책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정암집]외에 몇 권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내삼문 안으로 사우(사당)이 있습니다.

정암 조광조 선생뿐만 아니라

조광조 선생을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고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것으로 유명한

학포 양팽손 선생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내삼문의 문은 일 년에 두 번

음력 2월8월 중정일에

대제를 올릴 때만 열립니다.

사우 옆 장서각 맞은편에는

고직사라고 하는 건물이 나옵니다.

향사를 준비하거나 배향할 때

참례자들이 대기하는 장소입니다.

사우 옆으로 작은 쪽문이 나옵니다.

쪽문을 나서면 400년 된 느티나무가 나옵니다.

오랜 역사가 숨 쉬고 있는 심곡서원입니다.

거인재 옆으로 연지가 있고

그 뒤로 큰 느티나무가 서 있습니다.

500년 된 보호수로

정암 조광조 선생이 심은

느티나무라고 합니다.

별당으로 외삼문을 통과하지 않고 돌아가면

산앙재라고 하는 건물이 나옵니다.

현재 서예를 배우는 장소로 사용 중에 있습니다.

아파트로 빼곡히 둘러싸인 곳에

유학의 스승을 넘어 개혁의 참 스승을 모시는

심곡서원이 있습니다.

짧은 생애였지만 선생이 남긴 개혁 정신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심곡서원에서 조광조 선생의 흔적을 한번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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