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 서울수복이 있기 까지에는 오산 죽미령전투가 있었음을 기억하자 <시민홍보단 김현학>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 장군의 미군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B·C 중대 406명과 52포병대대 A 포대 134명, 총 540명으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수원에서 오산으로 이동하는 북한군 남하를 저지하라는 긴급 명령 하달받는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7월5일 오전 7시 수원에서 남하하는 북한군과 6시간 15분의 전투를 전개했으나, 소련제 T-34 전차와 고도로 훈련된 보병 5,000여 명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스미스 중령은 결국 14시 30분에 퇴각을 명령하였고 부상자 포함 미군 181명이 희생되었다.
이들의 값진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아군은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수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9·18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수복을 이룰 수가 있었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죽미령 고개 정상에는 유엔군을 대표로 참전한 미 스미스특수임무부대원들의 북한 공산군과의 첫 전투를 기념하기위해 유엔군초전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 1950년 7월 5일 오전7시에 개시된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와 북한 공산군간의 6시간 15분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죽미령 고개의 모습이다.
▶ 더글라스 C-54 조형게이트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 부대원들이 죽미령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한국에 올때 부산의 수영비행장까지 타고 왔던 비행기로써 이를 그대로 본 따 만든 수송기 모형의 문이다.
▶ 1950년 7월 5일 새벽3시,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비를 맞으며 진지를 구축했다. 아침 7시 수원근처에서 북한의 전차부대를 확인한 이후, 8시 16분 첫 사격이 이루어지면서 북한군과 유엔군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6시간 15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루어진 이 전투는 확연히 차이나는 전력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하여 먼 타국의 젊은이들이 기꺼이 희생한 숭고한 전투였으며, 이후 한국전쟁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중요한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 평화공원 상징물과 유엔군초전기념비
평화공원 상징물은 6시간 15분간의 죽미령전투로 말미암아 찾아온 평화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이다. 가운데의 다알리아 꽃의 꽃말은 '감사'로 참전용사를 향한 감사와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유엔군초전기념비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들의 값진 희생과 헌신을 추모하기위해 1955년 미 제24사단이 죽미령전투가 있었던 죽미령에 세우고 이들을 기렸다. 미 24사단 유럽 전속 이후인 1956년부터 미군과 함께 오산시 주최로 매년 7월 5일에 추도식을 개최하여 오고있다.
▶ 치열했던 피아 공방전이 펼쳐졌던 피의 능선에는 현재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경기도 오산시 경기대로 742)이 조성되어 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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