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들의 독립운동,

봉화 '파리장서비'를

소개합니다.

봉화군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230-1

안녕하세요. 봉화군 SNS 서포터즈 이종진입니다. 3.1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3.1절과 관련된 봉화에서 여행해 볼 만한 곳을 소개해 드릴 텐데요. 바로 봉화 파리장서비입니다.

이곳은 봉화군청 주변으로 영동선이 지나가는 철길 부근에 있고 또한 송록서원 옆에 있기에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 중 봉화 출신 애국지사 아홉 분의

숭고하고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건립하였습니다.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역사적인 장소로써 겸허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표해 주시고

주변이 깨끗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파리장서비가 무엇이냐 하면 파리평화회의에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알리는 서한에 서명한 것을 기념하는 비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한국의 유림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평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했습니다. 이 서한은 "파리장서"로 불리며, 일제의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곽종석, 김복한 등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서한은 김창숙을 통해 상해로 보내졌고, 이후 김규식을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되었습니다.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 국내 향교에도 배포되어 한국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한 유림을 체포·투옥하는 탄압(제1차 유림단 사건)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들은 더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공원에 최초로 파리장서비가 건립되었으며, 이후 전국 각지에도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서울 장충단공원

경남 거창

경남 밀양

대구 월곡역사공원

전북 정읍사공원

경북 봉화 송록서원

파리장서비 우측에는 송록서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서원은 서기1868년(고종5년)에 훼철된 송천서원과 반천서원, 백록리사 등에 봉안되었던 진일재 류승조 선생을 비롯한 10분의 위패를 모셨던 곳으로 140여 년 만에 복설 되었습니다. 봉안 위의 유덕을 추모하고 높은 학문과 충효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는 장소가 되도록 겸허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표해 주시고 주변이 깨끗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파리장서비를 둘러볼까요? 봉화 파리장서비는 꽤나 크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봉화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옆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는 가운데 장엄하게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의 파리장서비는 작은데 이곳은 기념탑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건립 취지문

어느 시대든 과제가 있기 마련이고, 이를 풀어가는 바른 줄기가 시대정신이다. 무너진 나라를 되찾아 세우는 시대정신을 실천한 사람을 독립지사라 일컫는다. 이곳 봉화도 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파리장서 운동 참가자가 단연 우뚝하다. 1919년 3·1운동은 대한민국 독립운동 51년 역사에서 한가운데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 평화 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때, 온 겨레가 일어나 대한민국이 독립국이라고 전 세계에 선언한 것이 3·1운동이고, 그 평화 회의에 심산 김창숙 선생의 지휘 아래 면우 곽종석 선생을 필두로 137명의 대한민국 유림 대표가 보낸 독립 청원서가 파리장서였다. 여기에 봉화 출신 유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봉화읍 유곡리의 안동권씨 문중에서 권명섭, 권병섭, 권상문, 권상원, 권상도, 권상익 선생, 봉화읍 해저리의 의성김씨 문중에서 김건영, 김순영, 김창우 선생 등 아홉 분이 그 주역이시다. 서명 유림 137명 가운데 경북 출신이 62명으로 가장 많은데, 봉화는 성주(15명)와 달성(11명) 다음으로 세 번째이니, 파리 장서 운동에서 가지는 봉화의 위상은 실로 다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은 봉화 선비들의 올곧은 성품과 시대적인 과제를 풀어나간 바르고도 강한 의지를 고스란히 말해준다. 이들의 뜻은 한 해 뒤 제2차 장서 추진과 1925년부터 이듬해까지 펼쳐진 제2차 유림단 의거로 이어져, 유림이 주체가 된 항일투쟁의 마지막 장으로 타올랐다. 뜻을 바르게 세우고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선 자랑스러운 역사의 발자취를 봉화 선비들이 보여준 것이다.

이곳을 지나는 이들이여!

모두 옷깃을 여미고

봉화 선비의

올곧고 높은 뜻을 기리면서, 고개 숙여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을 잇겠노라 다짐하자.

파리장서독립운동 95주년을 맞이하여 2014 8.

봉화출신의 서명자별 공적이 탑 좌우 측에 적혀져 있습니다. 권명섭, 권병섭, 권상문, 권상원, 권상도, 권상익 선생은 봉화읍 유곡리 출신으로 건국포장, 건국훈장, 대통령표창 등을 추서 받았습니다.

김건영, 김순영, 김창우 선생은 해저리 출생으로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해저리는 지금 파리장서비가 위치하고 있는 곳입니다.

뒤편에는 연서인과 한국유림이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글이 4면에 걸쳐 적혀져 있습니다.

정리해 볼까요?


1919년, 한국 유림 대표들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였습니다. 이들은 조선이 일본의 불법적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공정한 판단을 통해 독립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1. 유림 대표들의 호소문 배경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이후, 조선의 민중들은 부당한 억압과 수탈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1919년 3월 1일, 전 국민이 참여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유림들도 이에 동참하여 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한국 유림들은 유교적 전통을 기반으로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것이 도덕적 책무임을 강조하며, 국제사회에 한국의 현실을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2. 한국은 독립 국가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음

유림 대표들은 한국이 4,000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명국이며, 강토는 3천 리, 인구는 2천만 명에 달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한국은 자주적으로 나라를 다스릴 능력을 갖춘 국가로서, 일본의 통치를 받을 이유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들은 “천지와 민물의 조화”라는 개념을 들어, 한국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국가이며 외세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 일본의 불법적 침략과 잔혹한 통치

유림 대표들은 일본이 조선과 맺은 여러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한국을 강제 병합하였다고 지적하였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며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됨.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 후 조선의 자주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이후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듦.

1905년 을사늑약 :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사실상 식민지화.

1910년 강제 병합 : 조선을 완전히 일본 영토로 흡수하고 무단 통치를 실시.

이 과정에서 일본은 폭력적인 군사 통치를 시행하였으며, 왕조 폐위, 국토 강탈, 민족 문화 말살, 무고한 민간인 학살 등 반인도적 행위를 자행하였습니다.

4. 한국 민중의 끊임없는 저항

한국 유림들은 조선 민중이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3·1운동을 통해 전국적 항쟁이 일어남

무장 독립운동도 곳곳에서 전개됨

유림들도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연대함

이들은 “하늘이 우리를 굽어살피시길 기원하며” 맨손으로라도 끝까지 싸울 것임을 선언하였습니다.

5. 파리평화회의에 대한 요청: 공정한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유림 대표들은 국제사회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일본의 주장에 속지 말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습니다.

일본은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복속되었다"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명백한 허위임.

한국 민중은 자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일본의 폭정에 저항하고 있음.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한국의 독립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함.

이들은 “풍속과 강토는 갑자기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며, 한국이 역사적으로 독립국임을 강조하였습니다.

6. 유림 대표들의 마지막 호소: 한국 독립을 인정해 주십시오

유림 대표들은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에게 공정한 판단과 정의로운 결정을 내려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공정한 판단으로 큰 광명(光明)이 비추기를 바랍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이들은 한국의 독립이 단순히 한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임을 강조하며, 국제사회가 반드시 이에 응답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결론: 유림의 호소문은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일부였습니다

1919년 한국 유림의 파리평화회의 호소문은 단순한 탄원서가 아니라, 일본의 불법적 지배를 세계에 고발하고, 한국이 독립국임을 천명한 역사적 선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선조들이 남긴 이 절실한 외침을 기억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한 모든 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봉화에서 만난 파리장서비를 통해서 봉화의 유림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나라를 생각하는 이가 많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파리장서비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는데요. 봉화는 역사적으로 뜻깊은 곳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3.1절을 맞아서 이렇게 파리장서비를 찾아서 읽어보고 선조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알아보는 여행은 어떠실까요?

다음에도 봉화의 소식 전해드릴 테니까요.

봉화군의 블로그,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많이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안녕!


*제5기 봉화군 서포터즈

이종진 님의 글과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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