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독립운동의 터전 보성학교 전시관
제9기 울산누리 블로그 기자 오준서입니다.
한동안 지속되었던 무더위도 한 풀 꺾이고, 이제 뭘 해도 좋은 계절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대되는 9월이 왔습니다.
9월엔 조금 이른 추석 연휴도 있고요. 지난 8월 한 달 내내 더웠던 탓에 지친 심신을 달랠 수 있는 시간들이 부디 많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9월의 우리 울산에서는 각 구군마다 크고 작은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습니다만 울산을 알리고 홍보하는 역할을 하는 블로그 기자로서 아직 차마 가보지 않은 곳, 또는 우리 블로그를 통해서 다소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을 발굴해 소개하는 9월 한 달을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그 첫 방문지는 바로 울산 동구 일산동에 위치한 항일 독립운동의 터전인 보성학교 전시관입니다.
보성학교 전시관
○ 관람료 : 무료
○ 관람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입장은 17시까지)
○ 휴관일 : 1월 1일, 매주 월요일, 설날 및 추석 연휴
울산 시내버스 타고
보성학교 전시관 찾아가는 방법
번덕마을(현대중공업일산문 방면, 24232)
101, 102, 103, 104, 106, 108, 111, 112, 122, 123, 124, 127, 132, 133, 401, 431, 1401, 1421번
☞ 이 정류장은 꽃바위를 출발해 꽃바위를 순환하거나 달천, 들꽃학습원, 율리, 덕하, 성안, 남목, 모화, 북울산역, 천상, 태화강역, 울산과학기술원 방면 등으로 운행하는 울산 시내버스 노선들이 정차하는 정류장입니다.
번덕마을(일산해수욕장 방면, 24231)
101, 102, 103, 104, 106, 108, 111, 112, 122, 123, 124, 127, 132, 133, 401, 431, 1401번
☞ 이 정류장은 꽃바위 또는 달천, 들꽃학습원, 율리, 덕하, 성안, 남목, 모화, 북울산역, 천상, 태화강역, 울산과학기술원 등에서 출발해 꽃바위를 순환하거나 꽃바위 방면으로 운행하는 울산 시내버스 노선들이 정차하는 정류장입니다.
서민 가정에 살고 있는 자녀들에게 근대교육은 물론 항일 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했던 보성학교는 지금의 울산 동구, 당시의 울산군 동면 지역에서 반일 운동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일에 중심 축이 되었던 성세빈, 박학규, 김천해, 서진문, 이효정 등 여러 교사들에 의해 민족의식 교육이 진행되었던 곳입니다.
지역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보성학교는 1929년에 학교 폐쇄 명령을 받았고,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교장 성세빈 선생을 비롯해 일제가 사상이 불온하다고 지목한 교직원 모두가 사퇴함으로써 위기 상황은 일단락되었고, 결국 학교 대표자 변경과 군에서 인정하는 교원들로 하여금 학교 폐쇄라는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보성학교의 '보성'이란 뜻은 널리 열어 사람다움을 이룬다는 뜻으로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최초 사립 전문학교에 내린 이름입니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후 우리 교육을 통제하며 초등교육기관을 보통학교라 칭하였으며 이에 반발한 민족 선각자들은 고종황제가 하사한 ‘보성’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 사립학교를 세워 민족계몽과 항일정신을 깊게 세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보성’은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항일독립운동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당시 울산 동면의 민족 사립 보성학교는 모두 두 차례 설립되어 먼저 1차 설립은 1909년 당시 일산리(현재 일산동)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제의 억압 속에 폐교된 바 있습니다.
그 후 2차 설립은 3.1운동으로 독립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민족교육의 열기가 확산되던 1920년에 성세빈 선생의 제안으로 재설립되었으나 보성학교를 다시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의식이 더욱더 높아졌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보성학교에 대한 역사도 아주 유서가 깊습니다.
보성학교 교사를 지내다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서진문이 1928년 체포되어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고요.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울산군 동면에 소속되어 있는 시민단체가 장례를 치른 뒤 일제 당국이 본격적으로 탄압을 시작하게 됩니다.
3.1만세운동이 무려 10년째 계속되던 해에 보성학교 마당에 모두가 함께 모여 찍은 사진 속에서는 학교폐쇄 통지와 함께 일제의 탄압을 앞두고 있던 시기라 비장하면서도 비통함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보성학교와 관련 있는 인물에 대한 내용들은 잠시 후에도 다뤄보겠습니다만 앞서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성세빈이라는 인물은 아주 중요한 인물이기에 먼저 한 번 다뤄보도록 할게요.
성세빈 선생은 당시 울산군 동면 출생으로 3.1운동 이후 교육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소신으로 문맹을 퇴치하며 항일 구국 운동에 기여하기 위해 보성학교를 설립한 인물입니다.
울산 청년동맹 집행위원, 사회단체 정우회 울산지회, 신간회 울산지회 등에서 항일투쟁과 농촌계몽 그리고 항일정신 고취에 앞장서서 각 급의 지도자로서도 활동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던 중 성세빈 선생은 1938년 6월 25일 46세의 나이로 서거합니다.
보성학교 전시관에서 본 사진 속에는 ‘창립자(創立主)의 (고별식) 告別式 고(故) 성세빈(成世斌)과 보성학원(普成學院)’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 모두가 함께 슬퍼한 장례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나 말고 이군(李君)을 보호하라.
나의 삶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대한독립만세, 무산자 해방 만세.
서진문이 남긴 유언 세 마디
항일운동의 중심, 사립 보성학교에는 설립자이자 교장인 성세빈 선생과 보성학교 설립에 참가하였으며 노동야학 교사인 김천해(김학의)를 비롯하여 장인두, 서진문, 박학규, 장기준, 김경출, 천호문, 장병준, 이효정, 박두복, 최도준, 김두생, 천순도, 정진도 등 많은 교사들이 민족의식 교육이 펼쳐졌습니다.
그중 보성학교 전시관에서는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으로 대두되고 있는 울산교육 독립운동가 성세빈 선생과 1932년 보성학교에서 첫 교사 생활을 시작했던 이효정, 보성학교와 여성 야학에서 교사를 지낸 서진문 등의 시와 유언을 재조명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이 공덕비는 울산군 동면 출생의 천호문 선생의 공덕비입니다.
천호문 선생은 일본 명치대학부 수학 후 일산 보성학교에서 학생을 훈육해오며 당시 적디 적은 교사의 월급으로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하여 음식과 학용품 등 구호 활동을 한 인물입니다.
이에 1999년 김진수 학생대표를 비롯한 선생의 제자들이 후학 양성을 위해 애쓰신 선생의 희생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덕비랍니다.
실제 원형은 울산 북구 효문동 산성마을에 위치해있답니다.
또 지금의 졸업장 격인 ‘사립보성강습소 졸업증서’와 졸업생에 대한 정보를 한 데 기록해놓은 보성학교 졸업생 대장 등 울산 민족의 상징이자 항일운동의 근거이며 일산진 항일운동의 발자취라 할 수 있는 사립 보성학교에 대한 진귀한 자료들도 박물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일산과 방어진을 장학한 일제 수탈에 맞서고 울산군 동면 소년운동과 청년운동을 전개하며 울산군 동면을 넘어서 울산 독립운동의 버팀목으로도 자리매김했던 항일 독립운동의 터전 보성학교.
그리고 그 모든 기록과 역사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보성학교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보성학교 전시관입니다.
둘러보는 내내 오랫동안 울산에 살면서 잘 몰랐던 울산의 새로운 역사를 알아갈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 해당 내용은 '울산광역시 블로그 기자단'의 원고로 울산광역시청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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