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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전
계획도시 백제의 왕궁 유적, '부여 관북리유적'
백제시대 왕궁터인 관북리 유적과
조선시대 부여현 관아를 톺아보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
몇 년 전 인문학 강좌 과정에서 부여 관북리유적(扶餘 官北里遺蹟)으로 현장 답사를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단체 답사는 여러 사람이 가진 지식과 정보를 나눌 수 있는 특장점이 있는가 하면, 시간 제약으로 답사지 전체를 천천히 둘러볼 수 없는 단점이 있어 아쉬움이 뒤따릅니다. 지난달 말, 부여 관북리유적을 다시 찾게 된 이유입니다.
관북리유적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백제사비기(538~660)의 왕궁 유적입니다. 부여 시가지의 북쪽에 위치합니다. 30년 넘게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대형 전각건물터를 비롯한 공방시설, 연못, 목곽저장고, 석곽저장고, 도로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출토 유물로는 수부(首府)명 기와, 5부(5部)명 기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확인된 유구의 규모와 특징으로 미루어 관북리유적은 왕궁터로 추정되고 있으며, 정교하게 판축된 토성의 확인으로 백제의 왕성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관북리유적을 찾은 때에도 진입로 주변부의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현재의 관북리유적 발굴조사로 출토될 유물과 새롭게 조명될 역사적 사실을 기대하게 합니다.
관북리유적을 얼핏 보면 앞서 기술한 것처럼 유구의 규모가 넓은 데다 안내문 외에는 눈에 띄는 건물이나 시설물이 많지 않아 무심히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막상 관심을 두고 살피니, 장시간 둘러봐도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관북리유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시간적 여유를 갖고 둘러봐야 할 듯합니다.
안내판 중 한 곳에는 대형전각건물지를 복원한 그림이 보였습니다. 동서 35m, 남북 19.25m이며 동서로 7칸, 남북으로 4칸 규모였습니다. 기와를 올린 2층 구조의 건물지는 왕궁에서 중요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대형전각건물지 복원도를 머릿속에 그려가며 관북리유적을 돌아보니 넓은 규모의 왕성 추정지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대형전각건물지 내부에는 주춧돌을 놓기 위한 흙다짐기초 부분이 36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주공 초석, 원형 초석, 방형 초석, 장대석 유구 등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인근에는 '부와시설(敷瓦施設)'이라고도 불리는 기와깐 시설이 보였습니다. 동서로 7m, 남북으로 7.5m 길이의 땅에 기와를 한 겹으로 깔아 놓은 시설입니다. 이곳의 기와는 관북리유적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기와에 비해 작고 얇다고 합니다. 도장 글씨 기와를 비롯해 연꽃무늬수막새, 민무늬수막새 등이 함께 덮여 있다고 합니다. 폐와 무지 속에서 여러 문양의 출토 기와를 볼 수 있었지만, 안내문에 기술된 기와를 모두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기와깐 시설 위쪽에는 여러 개의 목곽수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목곽수조는 나무로 만든 물 저장소를 말합니다. 1호 목곽수조에서 이물질을 걸러 내면 기와로 만든 수로를 통해 2호 목곽수조로 모이는 구조라고 합니다. 3호 목곽 수조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다음, 길이 3.5m, 너비 1.5m의 나무판자를 연결해 만들었다고 하며, 수로는 토수기와(뒤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사다리꼴 모양의 반원통형 기와) 2매를 맞댄 기와관을 연결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중간 지점에는 연결부를 만들어 다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했다고 합니다. 목곽수조에서 발견한 도수관로는 오늘날의 상하수도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죠.
나무로 만든 목곽창고도 보였습니다. 바닥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뒤쪽으로 긴 판자에 이어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창고 안에서는 참외, 다래, 살구, 오이, 등 다양한 식물의 씨앗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지구 상에 참외를 먹는 나라가 몇 안 된다고 하는데, 백제시대부터 참외를 먹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합니다. 목곽창고에서는 식물 씨앗 외에 많은 양의 토기와 '공(功)' 자가 찍힌 기와와 호자(虎子; 호랑이 모양으로 만든 남성용 이동식 변기)도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연꽃의 줄기와 뿌리 등이 발견되어 연지로 추정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연지 때문에 관북리유적은 연꽃 피는 계절에 방문하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 직사각형 형태의 연못의 주변은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5~6단으로 쌓았습니다. 연못의 북쪽에 기와를 이용해 만든 수로가 발견되었으며, 백제 시대의 기와, 토기편, 목간, 짚신, 금동제 귀걸이, 개원통보(開元通寶; 중국 당나라 621년의 대표적인 동전)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옛 백제인들이 연못에 던지거나 분실한 물건이 후대에 전해진 것이라 생각하니, 그들의 실수가 위대하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관북리유적의 공방시설과 철기제철소까지 둘러보고 나서 부여현 관아도 살펴보았습니다. 부여현 관아는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아 건물입니다. 현재동헌과 내동헌(내아), 객사가 남아 있습니다.
부여 동헌은 조선시대 현감이 공무를 보던 관아의 중심 건물입니다. 부여 동헌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었으며, 1985년에 수리했다고 합니다.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연당(超然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제민헌(濟民軒)'이라고도 합니다. 추위에 취약해 보이는 건물을 돌아보며 한겨울의 근무 환경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부여 동헌 좌측 사면에는 부여현자료관이 자리해 있습니다. 평일 점심시간이 지난 때임에도 개방돼 있지 않았습니다. 관람을 희망하는 분들은 출발 전에 기사 하단의 문의처로 문의해 보시길 바랍니다.
부여 내동헌은'내아(內衙)'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관아의 안채 건물을 말합니다. 현감의 살림집으로 오늘날의 사택과 같은 곳입니다. 지금은 건물 뒤편에 자리한 도강영당(道江影堂; 홍가신, 허목, 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의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여현 관아에서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부여 객사입니다. '부풍관(扶風館)'이라고 하는 부여 객사는 부여현의 숙소입니다. 객사는 고려시대부터 각 고을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사신이 머물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입니다. 고종 6년인 1869년에 솟을대문 형식으로 지어졌으며, 한때 국립부여박물관의 진열실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구 부여박물관 건축물에 들어섰던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의 운영이 2024년 12월 31일(화)로 종료됐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몇 년 전 답사에서 한 시간 남짓 돌아봤던 부여 관북리유적과 시간에 쫓겨 일부 건물만 보고 지나친 부여현 관아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살펴보았습니다. 그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기쁨을 누린 부여에서의 하루였습니다.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여현 관아
○ 위치: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13
○ 이용시간: 09:00~18:00(연중무휴)
https://www.buyeo.go.kr
○ 문의: 041-830-2880
○ 촬영일: 2025년 1월 24일(금)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엥선생 깡언니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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