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는 사람 사이

추억은 쌓여갔네

반가운 만남과 아쉬운 이별이 공존하는 공간. 돌아오는 이를 마중하고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기차역이다. 웃음과 눈물이 어우러진 기차역을 일평생 지킨 최중호 전 춘포역 명예역장이 기억하는 마중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제는 추억이 된 그 시절 기차역

1965년 역무시험 합격 후 1998년 명예퇴직하기까지 34년여를 역무에 쏟은 최중호 어르신.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 제210호 춘포역의 명예역장에 위촉되며 그리운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을 지키며 관광객들에게 역뿐만 아니라 일본 가옥, 정미소 등 인근 근대문화유산을 소개했다.

명예역장으로 활동하며 추억도 많이 쌓였다. 한번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예전 춘포역 광장은 엿이나 물을 팔던 삶의 터전이었는데 이 소중한 곳을 잘 지켜줘 고맙다고 말이다.

명예역장에서 물러난 지금도 이따금 안내를 부탁하는 연락이 오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간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역을 생각하는 열정만큼은 젊은 세대 못지않다. “기차역은 희로애락이 담긴 곳이자 내 삶의 일부”라고 답했다.

옛 동이리역 근무를 시작으로 군산역, 이리역, 김제역을 거쳐 익산역으로 돌아온 그에게 기차역에 관한 추억은 차고도 넘친다. 강산이 세 번도 더 변한 세월 동안 이곳도 참 많이 달라졌다. 그가 거쳐간 각 역 앞 논밭이 있던 자리에는 건물이 들어섰다.

특히 익산역에 얽힌 기억이 많다. 손님을 서로 태우겠다고 실랑이하던 택시기사가 뒤엉켜 있던 광장은 질서정연하게 바뀌었다. 명절이면 예매하려는 사람들로 역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기차표 대신 플랫폼까지만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끊어서 열차에 오르려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비가 오면 일명 ‘굴다리’로 불린 지하도가 침수돼 송학동 쪽에서 철길로 직접 건너오던 사람들도 많았다고. “어디 그뿐여? 역에 있으면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며 한참 동안 그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룻밤을 새고도 행복했던 기다림

오랜 세월 근무한 만큼 기억에 남는 마중 풍경도 여럿. 그중에서도 휴가 나오는 아들을 기다리던 부모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1970~80년대만 해도 지금처럼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군대 간 아들이 휴가 나오는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며칟날 나간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몇 시 기차를 타고 언제 도착하는지 모르니 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아침부터 나와서 이튿날까지 기다리는 게 안타까워 플랫폼에서 국수를 사준 적도 많단다. 그 마음이 고마웠던지 부대 복귀하는 날 인절미며 찐 고구마를 챙겨와 감사 인사를 표하기도 했다고.

명절이면 고향을 찾은 이들로 붐볐는데 해마다 사연도 많았다. 선물세트를 열차에 두고 내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럴 때면 다음 역에 연락해 몇 칸에 짐이 있으니 올라가는 차 편에 보내라고 전했고, 짐을 찾아가면 함께 기뻐했다고. 설레는 표정으로 연인을 기다리다 함박웃음 짓던 모습,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 왈칵 눈물을 쏟던 순간 등. 지금도 역에 가면 그때 그 풍경이 펼쳐진단다.

“일생을 바친 곳이어서가 아니라 빠르고 정확하고 안전한 기차를 많이 이용하면 좋겠다”는 최중호 어르신. 그의 바람이 이뤄져 기차역에서 저마다의 마중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글, 사진 = 전북특별자치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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