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영탑사의 전설과 문화재

고려말 유명한 무학대사는 '왕십리'의 땅모양을 좋게 보고 있었습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새 도읍지를 찾아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소를 몰며 지나가던 노인을 만나게 되고 꾸지람을 듣습니다.

​'돼지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눈에는 부처님만 보입니다'라는 이야기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그것 또한 무학대사의 유명한 야사입니다.

아니 그렇게 현명한 말을 골라하던 무학대사를 미련하다고 꾸짖는 노인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도선대사였습니다. 그리고, 무학대사는 노인이 도선대사였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도선대사의 충고대로 무학대사는 지금의 경복궁에 궁궐을 짓게 됩니다. 이렇게 무학대사와 태조가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게 된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인지 왕십리에는 현재에도 도선동이라는 이름이 현재 복원되어 남아 있습니다.

물론 도선대사가 태어난지 정확하게 500년 후에 무학대사가 태어났기 때문에 실제로 만날 수는 없습니다.

도선대사가 무학대사에게 조언을 하기 위해 영령으로 나타난 것이죠.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고려의 도선대사와 조선의 무학대사가 만난 곳이 또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당진시 영탑사입니다.

이처럼 천년고찰 영탑사에서도 그 인연이 이어집니다. 이제부터 영탑사를 둘러보겠습니다.

영탑사는 당진시 면천면 상왕산에 위치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도선대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영탑사는 그 후에 무학대사가 현재의 법당 자리에 있던 천연암석에 불상을 조각하고 절을 중건한 것입니다.

고려말에 무학대사가 사찰을 둘러보니 기이한 바위가 빛을 내고 있어 심상치 않게 여겨 여기에 불상을 조각해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영탑사 약사여래상입니다.

도선대사는 풍수지리설의 원조이자 '도선비기'로 대표되는 예언가 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미리 예언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신라의 임금 헌강왕도 궁궐로 초빙하여 직접 법문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500년의 세월을 초월한 도선대사와 무학대사의 인연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인연과 걸맞는 약사여래상 외에도 영탑사에는 또 다른 여러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9호 영탑사 범종입니다. 생각보다 매우 작고 아담한 모양입니다.

대웅전 한쪽구석에 있는 모습이 약간은 안스럽기도 합니다.

이 종은 1760년 조선 영조때(37년) 가야사 법당에 있는 금종을 녹여 만들었습니다. 가야사는 충남 예산 서원산에 있는 사찰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풍수지리설에 따라서 1860년(현종 6년)에 가야사를 불을 질러 없애고, 그자리에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으로 사용합니다.

나중에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친 사건은 당진 신리성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또 다른 보물은 제409호 당진 '영탑사 금동 비로자나불 삼존 좌상'입니다.

지은 지 얼마 안된 현대식인 건물에 내부 사무실과 같은 공간에서 보관되어 있어서 의외였습니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이러한 매치는 뭔가 신선하면서 언발란스한 느낌을 줍니다.

전면에는 유리로 있어서 외부 역광으로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탑사에 모신 불상은 8각형의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이 있고 양 옆으로 협시보살이 있는 삼존불구도입니다.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가 큼직합니다. 상반신은 길고 큼직한 데 비하여 하반신이 무척 위축되어 있어 불안정한 느낌을 줍니다.

무릎 높이도 상반신에 비하여 낮아서 몸의 균형이 고르지 못하다. 가슴 역시 평면적이며 하반신 처리는 둔중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수법은 고려 중기 이후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손은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모양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이러한 금동불상모습은 구도와 형태 등에서 고려불상의 특유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여겨 봐야할 것은 뒷산쪽에 있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6호 영탑사 칠층 석탑입니다. 대방 앞 정원에 있던 5층 석탑을 법당 뒤의 바위 위로 이전되었습니다.

5층만 남아있던 것을 1920년대에 이 절의 신도들에 의해 다시 7층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바위를 기단으로삼아 7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이 탑은 바위와 탑이 만나는 부분이 조금 어긋나 있습니다.

탑신의 각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이 있습니다. '지붕돌은 1층부터 5층까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처마의 선이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는 반면, 새로 만든 6층과 7층은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리고 밑면의 받침조각도 얇아서 서로 대조를 보입니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상당히 간략화된 모습입니다. (출처; 문화재청)'

올라가서 영탑사를 바라보면 시원한 광경이 보이며 뒷편으로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병풍처럼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유리광전아래의 정갈한 담입니다.

영탑사는 오래된 사찰이지만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을 줍니다.

아무래도 오래된 전설과 나름대로의 사연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의 여러 보물을 간직한 영탑사지만 과연 지금의 진정한 나의 보물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하루였습니다.

오래된 전설을 상기하면서 뒤돌아 보는 여유를 바라신다면 영탑사를 둘러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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