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시간 전
[기회기자단] 1919년 3월 경기도 곳곳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 만세’
[김도연 기자]
광복 80주년,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경성부와 경기도는 1919년 3월,
한반도에서 가장 치열하게
일제에 저항을 하였던 지역이다.
기자는 안성3.1운동기념관 취재에 이어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과 광복 80주년 3·1 운동
106주년 특별기획 ‘항거, 수원 1919’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수원박물관을 다녀왔다.
김포시 양촌읍에 위치하고 있는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은 1919년 3월 22일부터
3월 29일까지 8일간의 김포 독립운동과
김포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2013년에 개관하였다.
김포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군중의 집회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그중 대규모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던 곳이
양촌면 오라니장터이다.
1919년 3월 22일 월곶면과 검단면을 시작으로
3월 29일까지 8일간 양촌, 고촌, 하성 등지에서
약 12회 걸쳐 3.1 독립 만세 운동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집회 인원은 15,000명으로,
이 과정에서 12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에서 만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야기
일제의 만행으로 인내의 시간을 보내던 우리 민족은
갑작스러운 고종 황제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는 민족의 단결로 이어져 1919년 3월 1일
대규모 항일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3.1 운동은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됐으나
이를 제지하는 일제의 탄압은 점점 심해졌다.
이에 표출된 민족의 독립 의지를 체계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조직이 필요해지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처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교적 노선을 지향하였으나,
1920년 독립 전쟁을 통한 노선으로 선회했고
1920년을 ‘독립 전쟁의 해’로 선포하며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사진은 지난해 광복절인 8월 15일부터
오는 6월 30일까지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1920 독립 전쟁의 해’
특별기획전시이다.
또한,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과 공동으로
3.1 운동 106주년이 되는 3월 1일부터
4월 27일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기억상자’
순회전을 진행하고 있다.
순회전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의 그날까지
외교, 군사, 행정,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어나간 정부 활동과 김포 출신 독립운동가
심영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원 목적으로
결성한 주비단에 대한 이야기도 볼 수 있다.
특히, 기자는 역사를 어려워하고 게임을 좋아하는
초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서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에서 개발한
메타버스 게임 체험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았다.
전시관을 열심히 살펴보고 나서 메타버스
게임 속에서 미션들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김포 독립운동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수원 독립운동의 중심 김세환 선생
김세환 선생은 수원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교육과 체육 발전에 삶을 헌신하였다.
919년 서울과 더불어 최초로 시작된
수원 3.1 운동과 이후 수원군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들이 김세환의 제자 또는 후배였다.
1919년 3월 1일 저녁 수원군 수원면
방화수류정부근에서 김세환의 지시로 김노적,
박선태 등 교사와 학생들,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인 등 수백 명이
횃불을 들고 모여 만세 운동을 벌였다.
종교인, 농민, 학생, 상인,
기생까지 참여한 수원의 독립운동
수원 3.1 운동은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만세 운동을 시작하여 수원면 최대 규모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던 4월 3일 우정·장안면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는 이에 보복하기 위해
제암리 교회에 무고한 주민 20여 명을 가두고
총을 쏜 후, 이웃 마을 고주리의 천도교 가족 6명을
몰살하는 ’4월 15일 제암리·고주 학살사건‘까지
일으켰다.
특히, 기생 김향화는
3월 29일 수원 기생 30여 명이
위생검사를 받으러 가던 중
혜의원(수원행궁 봉수당) 앞에서 만세 운동을
벌였고, 야간에는 상인과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곳곳에 만세를 부르면서 일본인 상점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체포된 김향화는 2개월여에 걸쳐 감금, 고문을 당한
후 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때 김향화는 유관순 열사와 같은 감방에서
생활을 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수원으로 돌아온 뒤
김향화는 1935년까지 15년 동안
수원에서 거주하다가 서울로 돌아갔고,
이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909년 수업상업회의소에서 민족자본을 바탕으로
무상 아동교육과 대중 계몽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수원상업강습소를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1916년 수업상업회의소가 해산되면서
수원상업강습소는 폐쇄될 위기에 처해졌으나
수원 지역 유지들의 노력으로 화성학원으로
개칭하고 운영을 지속하였다.
수원 기생들은 수원상업강습소의
운영비 마련을 위해서 1922년 5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간 수원극장에서 자선공연을 펼치고
벌어들인 수익금을 수원상업강습소에 기부하였다.
2009년 수원의 의로운 기생 김향화는
대통령 표창과 함께 독립유공자로 거듭났으나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독립유공자 표창장과
훈장메달은 현재 수원박물관 근대인물 코너에
전시되어 있다.
수원의 유관순 '이현경,
이선경 자매'의 독립운동
이선경은 수원 산루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1918년 수원공립보통학교
(현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사립
숙명여학교로 진학하였을 때
당시 서울에서 펼쳐진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품은 이선경은
1920년 수원 출신 유학생 박선태, 이득수, 최문순,
임효정 등과 함께 구국민단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으나 일제에 의해
구국민단이 발각되어 검거되었다.
핵심 단원으로 지목된 이선경은
모진 고문을 당한 다음 8개월 후 석방되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석방 9일 만에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선경의 언니인 이현경은 1919년
일본여자대학으로 진학하여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1920년과 1921년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대한민국독립선언기념일’ 만세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이후에도 1925년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인 삼월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26년 귀국 후에는 근우회 설립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
기자는 주말 동안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과
수원박물관 ‘항거, 수원 1919’ 특별전시를
취재하면서 다시 한번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학생, 농민, 상인, 기생까지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위험하지만 자발적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얼마나 나라를 되찾고 싶어 하였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특별기획전시들이 끝나기 전에
더 많은 시민들이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과
수원박물관을 비롯하여 경기도에 소재하고 있는
만해기념관, 몽양기념관, 조소앙기념관,
강화3·1운동역사기념관, 최용신기념관 등
독립운동 관련 기념관을 방문하여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한 우리 조상들의 뜻을
되새기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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