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산여행 ]

괴산군 가볼만한곳

괴산 우암 송시열 신도비 및 묘소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는

우암 송시열 신도비와 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한 분입니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주자학을 신봉하며

정치 붕당인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신도비와 묘소입니다.

안내판에는 송우암 신도비 및 묘소라 적혀있으며,

원래 묘소는 수원(水原) 무봉산(舞峰山:215m)에 있었으나, 1697년(숙종 23)에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습니다.

신도비를 보존하는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기와로 지어졌으며,

신도비는 1779년(정조 3) 청천리 묘소 아래에 세운 것으로

높이 2.5m이며 비문은 정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으며,

신도비에는 정면에 [有明朝鮮國左議政尤庵宋先生之墓]라고 쓰여 있으며,

이 비석은 국난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린다고 합니다.

송시열의 묘가 있는 청천은 송시열이

벼슬을 물러난 후 은거했던 화양동계곡과

노론 사림의 중심인 화양서원이 있는 곳입니다.

정읍에서 숨을 거둔 송시열은 본래 수원의 무봉산에

1689년 장사를 지냈으며,

현재 경기도 화성시 신동 산39번지 무봉재사(은진 송씨의 재실)의 뒤쪽 산 능선에 초장지였음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1757년 이곳 괴산 청천면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송시열 신도비 비각 오른편에는

이제 수령 370년의 은행나무가 고풍스럽게 서있는데,

지정연도가 1982년인 점을 감안하면

지금은 400여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고목 은행나무의 높이는 16m, 둘레는 35m이며,

현재 괴산 55호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신도비에서 송시열 묘로 이동하려면

신도비 왼쪽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참고로 여행객을 위한 안내표지판이 있었으면 합니다.

숲속 그늘이 있어 산책하는 느낌으로

천천히 한계단 한계단 오르면 금방 도착합니다.

풀섶 뿐만 아니라 돌계단 사이에도 예쁜 제비꽃이 피어서,

혹여 다치지 않을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합니다.

송시열 묘에 도착했습니다. 봉분, 비석, 문인석,

석등 등이 한눈에 들어오고 주변에는 소나무숲속입니다.

송시열은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한 후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어 출세길에 올라

효종 때 이조판서가 되어 북벌계획을 추진하였고,

우의정·좌의정까지 올랐다가 낙향하여 고향에 은거하며

조선 중기 정치의 실세로 활약했습니다.

1689년(숙종 5)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정읍에서 사사되었습니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론)을 주로 삼으라." 죽기 전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남긴 말입니다.

서인의 영수이자 노론의 종사인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 유학자, 저술가, 권신으로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조를 섬긴 원로대신으로,

그의 후학들에게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며 송자(宋子)라 불렸습니다.​

충북 괴산에는 이곳 신도비와 묘소 이외에도

송시열이 은거했던 화양서원과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근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만동묘를 비롯해

암서재, 읍궁암, 애각서적, 등 송시열과 관련된 사적들이 많습니다.


※찾아오시는길

우암송시열유적 :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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