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광성보
바다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었던 강화도는 전쟁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섬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강화해협을 통해 해상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12개의 진과 보를 설치하고 돈대와 포대를 구축하여 방어 체계를 강화했습니다.
광성보는 12개의 진보 중 하나입니다.
광성보는 고려가 몽골을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후 해협을 따라 쌓은 것이 그 시작입니다.
당시에는 돌과 흙을 섞어서 쌓았는데요, 이후 조선시대에 전체를 돌로 다시 쌓아 석성이 되었고
주변의 돈대를 총괄하는 보의 역할을 했습니다.
입장료 1,500원을 지불하고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강화 광성보에 도착하면 우선 인상적인 정문인 안해루가 눈에 들어옵니다.
1745년 성을 보수하면서 세운 누각이라고 해요.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광성돈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광성보에 소속된 세 개 돈대 중 하나로, 1679년에 세워졌습니다.
신미양요로 파괴된 이후 1976년에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복원된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이곳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돈대 내부에는 대포, 소포, 불랑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광성보 내부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습니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어 길을 잃을 걱정도 없습니다.
QR코드가 있는 강화 광성보 수자기 이야기 안내판에서는 어재연 장군이 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습니다.
어재연 장군은 광성보 포대에 수자기를 높이 내걸고 적을 맞았습니다.
어재연 장군의 부대는 쏟아지는 폭탄에도 불구하고 적들에 맞서 끝까지 싸웠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광성보에 걸려있던 수자기는 내려가고 성조기가 게양되었고, 미군은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가졌습니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는 2007년 장기 대여 방식으로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요, 강화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미양요로 인해 조선군 수비대는 350여 명이 전사하였고,
미군 측에서는 3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미군의 압도적인 승전이었으나 역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용맹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의 시신은 고향인 음상군에 안장하고 시원을 알 수 없는
51명의 시신을 일곱 기의 분묘에 합장한 신미순의총도 광성보 내부에 있습니다.
손돌목돈대는 1679년(숙종 5년)에 세워진 또 다른 돈대입니다.
면적은 778㎡이며, 성곽 길이는 108m입니다.
이곳 역시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장소입니다.
원래는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국방 강화책으로 강화도 내에 내성, 외성, 12진보, 54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며 포대를 설치하였습니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으로 3곳이 설치되었습니다.
마지막 용두돈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손돌목돈대와 연결된 외곽 포대입니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성벽 위를 걷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주변 경치 또한 매우 아름다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입니다.
1871년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되었고,
1977년에는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통해 현재의 용두돈대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이곳 역시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진 장소로,
저 멀리 바다 너머로 미 해군의 함대가 몰려왔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광성보에 있는 세 개의 돈대를 모두 둘러본 후 다시 입구로 돌아왔습니다.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을 천천히 걸으며 돌아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산책하기 좋은 강화의 명소, 광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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