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일 전
106주년 삼일절을 맞아 알아보는 진안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안녕하세요 자연의 친구 '진안' 입니다.
올해는 106주년 삼일절 입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향한 열망으로
용감하게 의지를 표현한 순국선열들의 숭고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
진안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오늘은 진안에서의 독립만세운동과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진안에서의 독립만세운동
3·1 운동은 일제강점기의 지배에 항거하여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독립선언을 목적으로 일어난 비폭력 운동으로,
약 3개월간 전국적으로 계속 되었으며
진안에서는 3월 25일부터 4월 13일까지 근 20일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특히 마령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오기열, 전영상 등에 의해
운동이 크게 확대되어 수백명의 군중이 참여하게 되었고,
진안군 최대의 만세운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독립운동사 제3권:삼일운동사(하) 제3절 진안군
출처: 국가보훈부
진안군에서는 3월 25일 진안읍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오전에 수백 명의 집단이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지어 시위행진을 하니
모여들던 장꾼이 여기에 합세하여 읍내는 만세의 환호성과 태극기의 물결로 경축의 성사가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성황에 당황한 적측에서는 헌병대가 부산하게 달리며 해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감격과 흥분에 싸인 군중의 행렬은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태도로
적의 제지선을 피해가며 만세의 함성을 더욱 우렁차게 울렸다.
여기저기서 헌병대와의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쌍방 모두 극단적인 충돌을 피하였기 때문에 얼마 후에는 별반 희생 없이 대열이 해산되었다.
한편 4월 3일에는 주천면(朱川面) 주양리(朱陽里)에서 주민과 생도들이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때 주양리에는 사립 화동(華東) 학교가 있었는데 유지 김주한(金周漢) 등은 이 날을 기하여
일대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화동 학교의 생도 양해관(梁海寬) 등을 권유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소년의 의기로 만세 부를 것을 생각하고 있던 양해관 등은 곧 여기에 찬동하였으며
그 날 4시경에는 생도와 주민들이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 드디어 감격적인 ‘대한 독립만세’의 환호성을 울렸다.
모두들 감격과 환희로 하여 어찌 할 줄을 몰라 하였다.
그리고 교정에서 만세를 부른 후 자진 해산한 이들은 다시 청년·생도들의 긴밀한 연락으로
그날 10시경에는 또 주민·생도 약 60명이 동리 앞 논들로 모여서 횃불을 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밤의 정적을 깨고 메아리쳐가는 만세소리는 더욱 웅장하고 감격적이었다.
이웃 마을에서도 호응의 만세 소리가 올라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김주한 등은 적 헌병대에 구속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뒤이어 4월 6일에는 또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도 오기열(吳基烈)·김영상(金永祥)·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 등의 주동으로
인근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역시 헌병의 출동으로 제지당하였는데 이때 주동 인물의 1사람인 황해수는
적 무력에 의하여 끌려가면서도 이제는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고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하라고 격려하며 늠름한 기색을 보여서 일반을 크게 격려하였다.
그리고 4월 12일에는 성수면(聖壽面) 도통리(道通里)에서도 평소부터 적측의 주목을 받아오던 전경원(全京元[彦])의 주동으로
수10명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이튿날에는 마령면(馬靈面)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4월 13일[음 3월 13일]은 마령(馬靈) 장날이었는데 미리부터 운동을 계획하고 지도하여 오던
오기열·전보익(全補益) 등은 장날을 기하여 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마령 시장과 주변에 몰려드는 군중들은 감격과 흥분에 휩싸였다.
임실군(任實郡)에서 마령면으로 오던 동척(東拓)
김제출장소(金堤出張所) 직원 온상영(溫象永)은 도중 성수면에서 만세 군중들에게 길이 막혔다.
군중들은 온을 포위하고 일본인이냐고 물으니 조선인이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만세를 부르자고 하였는데 그는 친일의 골수 분자였던 모양으로 이에 불응하였다.
흥분한 군중들은 낮으로 그의 옷을 갈기갈기 찢었는데 그는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서 진안경찰서에 사실을 보고하였다.
또 전보익은 원래 담력이 있었는데
이날 구마령 시장에서 일본인 경찰을 만나자 달려들어 그자가 찬 환도를 빼앗아 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령하니,
일본인 경찰은 손을 들어 민중들과 함께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서야 겨우 목숨을 구하여 달아났다.
전보익 의사는 그 후 적 무장대에게 검속당하였다가도 주재소의 벽을 발로 차서 부수고 탈출하였으며,
산상에 올라가서는 돌을 굴려 적의 추격을 분쇄하는 등 용감한 활약을 하기도 하였다.
이 마령·성수면의 만세운동 관계로 하여 오기열·김영상·황해수·전보익 등 여러 지사들이 4년 내지 수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마령 시장 만세운동 후에도 진안군의 인사들은 기회 있는 대로 운동을 계획하며
또 산발적으로 만세를 부르고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중에도 주천면의 청년 김영필(金永弼) 등은 그 해 4월부터 ≪대한민보(大韓民報)≫·≪독립신문(獨立新聞)≫ 등
독립운동 관계의 문서를 무주군 등지에 배포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이듬해 김영필이 주천면 경찰주재소에 검속되어 고문을 당하고 증인 심문이 있을 때에는
주양면 면서기 김규현(金奎鉉)이 우리는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찾으려 한 것인데 이것이 무슨 죄이냐고 하면서
주재소의 일인 순사 서부광재(西部光哉)·소택목지조(小澤牧之助) 등을 난타하여 중상을 입히는 등 의협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오기열(吳基烈) · 전영상(全永祥)
1919년 4월 6일 마령면 평지리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며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김주한(金周漢)
1919년 4월 3일 주천면 주양리의 화동학교와 소재지 일대에서
학생·주민들을 지휘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삼일절을 맞아 우리지역의 독립운동을 돌아보며,
애향심과 자부심 그리고 감사함을 되새겨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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