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경상남도 온라인 홍보 명예기자단 최홍대


경남 창원특례시의 진해라는 지역에는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 여름이 되면 진해의 바다로 나가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오래전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진해의 바다만 보이면 나가서 수영을 했다고 합니다. 진해구청이 자리한 곳에서 내려오면 진해 해양공원이 있는 명동항을 거쳐서 장항에 이르게 되는데 이 부근에는 일본인들의 전형적인 주거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더 내려오면 나오는 이곳은 안골포라는 곳입니다.

일본이 한반도에 그들의 문화와 흔적을 남긴 것은 무역을 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7년의 전쟁과 36년의 강점기에 남긴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 진출의 교두보였던 남해에는 그 흔적이 더 많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주로 방어나 공격을 위한 시설이 만들어졌으며 36년간의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이곳을 관리하고 살기 위한 공간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안골포라는 지명이 있는 이곳에서의 전투는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일본군의 주력을 격멸한 빛나는 전과로서 의의를 가지며, 연이어 패한 일본군은 부산으로 움츠려 들어 호남 진출을 포기하게 되었던 곳입니다. 안골포에 만들어져 있었던 안골왜성은 많이 허물어졌지만 수풀이 사라지는 겨울이 되면 그 흔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곳은 창원 6코스에 해당이 됩니다.

대부분 사라졌지만 아직도 진해를 잘 찾아보면 나가야라는 일본식 장옥 형태의 건축물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나가야는 ‘장옥’(長屋)이란 일본식 연립 주택 또는 다세대 주택의 이름이었습니다. 나가야 양식은 여러 가구가 지붕으로 나란히 이어져 있고 외벽을 공유하는 건물입니다. 즉 지붕은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대마다 입구는 만들어져 있는 형태입니다.

왜성은 전쟁이 길어지게 되면서 일본군은 당장은 조선군과 명군의 공세를 버티되 언제든지 공세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반도 주요 거점에다가 자기네들 축성법으로 성을 축조하여 농성했는데 이것이 왜성입니다. 왜성은 배를 접선하기 좋은 해안가와 강안에 위치하면서도 여차하면 서로를 돕기 쉽게 서로를 조망하기 좋게 밀도 있게 배치되었기에 모두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골포의 안골왜성에서 바다까지의 거리가 걸어서 10여분 정도가 될까요. 금방 배가 정박한 곳에 이르게 됩니다.

왜성을 쌓은 위치도 침략군인 일본군에게 적합한 위치였기 때문에 역으로 조선군이 방어용으로 재활용하려 해도 입지가 애매한 경우가 많아 이런 경우에는 방치하거나 아예 돌을 빼서 다른 데 쓰면서 형체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인들이 거주하기 위해 만든 것이 왜성이며 주민들이 거주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 일본식 주거입니다. 즉 진해에는 두 가지 형태가 모두 존재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사천 선진리 왜성처럼 비교적 그 형태가 잘 유지되는 왜성도 있지만 이제는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랜 세월 살아왔던 그 방식을 쉽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한반도에는 얼마나 많은 일본식 주거가 있었을까요. 그렇지만 근대문화유산의 의미 외에 한국인들이 거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이제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일본식 거주공간인 다다미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안골포에서 더 올라가게 되면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동섬이 나옵니다. 여름에 수영을 한다면 이곳을 추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창원에 자리한 남해바다 중에 맑다는 느낌을 확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동남아의 푸른 바다를 보는 것만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바다 갈라짐'은 주변보다 수심이 얕은 지형이 해수면 위로 드러나 육지와 섬(또는 섬과 섬) 사이의 바다를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동섬은 바다 갈라짐 길의 지형변화가 거의 없고 예보와 실제 발생시간이 거의 일치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 데크길의 너머로 보이는 작은 섬이 동섬입니다. 물깊이가 얕아서 이곳에서는 배가 정박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수심이 그러니 바다 갈라짐이 생기겠지만 말입니다.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으로서의 중요 역할을 해온 진해(鎭海)는 현재의 위치가 아닌 원래 현재의 창원시 진동면에 있었습니다.

진해 앞바다는 동쪽의 통영, 서쪽의 가덕도, 남쪽의 거제도로 둘러싸인 비교적 큰 바다로 진해만이라 불립니다. 조선초기 일본과의 상호 간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의 공식적인 접근과 거래를 위해 왜관 설치 등을 허용하면서 웅포(현재의 진해), 부산포(부산 초량), 염포(울산) 등 삼포를 개방했습니다.

동섬으로 가는 바닷길이 열리게 되면 한 바퀴를 돌아서 만들어놓은 데크길을 걸어볼 수가 있습니다. 물의 깊이가 깊지 않아서 그냥 걸어서도 접근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바닷물에 젖어도 상관이 없다면 말입니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는 웅포(熊浦·진해 남문동), 웅천(熊川·진해 웅천동), 송도(松島·진해 안골동), 원포(阮浦·진해 원포동), 사화랑(沙火郞·진해 남양동) 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현재 진해는 터널등으로 접근이 수월하지만 오랫동안 육지 속의 섬처럼 바다를 통하지 않고 접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다로 나가는 전초기지로 활용도가 높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육지로부터 오는 군사에 대한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남해 바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진해는 여러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 속살을 알면 알수록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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