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 전
경남도청, 진주를 떠난 지 올해로 100년
100년 전 4월 1일,
만우절의 거짓말처럼 믿기 힘든 일이
경상남도 진주에 일어났습니다.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진주의 근현대사에서 도청의 이전은
뼈 아픈 전환점입니다.
우선 경상남도(慶尙南道)라는 이름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전국이 23부제로 나뉜 뒤
다시금 1896년 13도제가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이 거짓말 같은 일은
경상 우병영이 있었고,
23부 관찰사가 있었던
진주성에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진주성의 정문인 공북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복원된 건물인 ‘중영’이 나옵니다.
중영은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의 2인자인
병마우후의 집무 공간입니다.
당시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도를 동서로 나눠
좌도인 울산에는 경상 좌병영이,
우도인 창원 합포(옛 마산)에는
우병영이 있었습니다.
우병영이 있던 합포영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사례 등으로
1603년(선조 36) 진주성으로 이전했습니다.
그러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각도의 병영이 폐지되면서 사라졌습니다.
중영을 옆으로 동아시아
국제전쟁 진주성 1차 전투를 승리로 이끈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이 나옵니다.
동상 뒤편으로 야트막한 언덕에는
영남포정사 문루(嶺南布政司 門樓)가 나옵니다.
경상남도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영남포정사의 정문입니다.
문루 앞에는
수령 이하 하마비(守令以下下馬碑)가 있는 까닭도
관찰사가 업무를 보는 공간이라
이곳부터는 관찰사보다 아래 등급인 수령은
말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뒤편에는 별칭인 망미루(望美樓)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영남포정사 문루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면
청계서원(淸溪書院)이 나옵니다.
이곳은 문익점 선생이 목화 씨앗을 원나라에서 들여오자,
목면(木棉) 씨를 길러내어
백성들이 무명옷을 입을 수 있게 한
퇴헌 정천익 선생(退軒 鄭天益 先生) 등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청계서원 옆 빈터를 지나면
고려 거란 전쟁 때 적에게 굴복하지 않은
충신 하공진(河拱振,?~1011년) 장군을 모신
경절사(擎節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청계서원 옆 담장 가까이 비석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1973년 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가
당시 진주성과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이중 병사 겸 목사 이수일 유애비가 있습니다.
우병영이 옮겨오며 한때 우병사가
진주목사를 겸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친일한 정태석(鄭泰奭), 정상진(鄭相珍),
정봉욱(鄭奉郁)도 함께 있습니다.
청계서원과 경절사 사이 빈터에는
운주헌(運籌軒) 터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경상우병영의 우두머리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집무실이 있던 곳입니다.
23부제가 시행될 때는 관찰사가 근무하던 곳이고
13도제가 될 때는 도지사가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우선 1895년 6월 23일(음력 윤 5월 1일) 시행한
23부제(二十三府制)를
부군제(府郡制)라고도 부릅니다.
당시 조선의 지방 제도를
최상위 행정 구역을 부(府)로 개편하고
그 하위 행정 구역을 군(郡)으로
명칭을 통일한 까닭입니다.
23개의 부(府)를 관찰부(觀察府)라고 하고
부의 장관을 관찰사(觀察使)라 했습니다.
오늘날 경상남도는
대부분 진주부와 동래부에 속했습니다.
진주부 아래에는
‘진주군, 고성군, 진해군, 사천군, 곤양군,
남해군, 단성군, 산청군, 하동군, 거창군, 안의군,
함양군, 합천군, 초계군, 삼가군, 의령군, 칠원군,
함안군, 창원군, 웅천군, 김해군’이 있었습니다.
동래부(東萊府, 1895-1896) 아래에는
‘동래군, 양산군, 기장군, 울산군, 언양군,
경주군, 영일군, 장기군, 흥해군, 거제군’입니다.
오늘날 창녕군에 속하는 창녕군과 영산군은
대구부 아래에 있었습니다.
23부제를 시행한 지
불과 1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1896년 8월 4일에 13도제가
시행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13도제가 시행된 이후 진주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도 경남도청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일제가 만주 대륙 침략 전초기지로 삼은
부산에 항만과 철도 사업을 벌이면서
도청도 결국 옮겼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조선총독부는
1924년 12월 총독부령 제76호로
기습적으로 도청 이전을 발표하고
1925년 4월 1일 부산으로 이전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여러 차례 도청 이전설이 불거졌지만,
그때마다 진주 사람들은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당시 진주 사람들의 반발이 아주 심했습니다.
1924년 7월 28일 자 조선일보는
'진주시민대회(晉州市民大會)
도청이전(道廳移轉)은사활문제(死活問題)'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진주시민대회(晉州市民大會)
도청이전(道廳移轉)은사활문제(死活問題)라고
이십륙일촉셕루에서개최
경남진주군(경남진주군(慶南晋州郡))에셔는
다수한번영회(번영회(繁榮會))간부가
매일중셩동(중성동(中城洞))에 사무소를 두고
사무를 집행하며 지난이십륙일에
촉셕루상(촉석누상(矗石樓上))에셔
시민 대회를 열고 진주시민은 살아야죠흔가
죽어야죠혼가의 문뎨를
토의(토의(討議))하얏다는데~
‘관찰사’라는 명칭도
1910년 조선이 망하면서 사라졌습니다.
이후 일본식 용어인 ‘도장관’이었다가
1919년에는 지금의 ‘도지사’로 바뀌었습니다.
부산으로 떠났던 도청도 부산시가
1963년 직할시(현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다시 경남으로 되돌아왔습니다.
1983년 7월 1일, 58년간 부산으로 떠났던 도청은
진주가 아닌 창원이었습니다.
창원 용지문화공원 내에 영남포정사 문루를 본뜬
‘새 영남포정사’ 문루가 있습니다.
운주헌 터에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이 나무는 지난한 경남도청의 역사를
알고 있을 듯합니다.
진주성에서 바라보이는 진주교는
도청 이전으로 성난 진주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지은 다리입니다.
현재의 진주교는 물론 한국전쟁 때
파손되고 다시 지었지만,
당시에는 경상남도 최초로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다리였습니다.
잿빛 하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란 산수유가 성내에 활짝 피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산수유를 앞에 두고
영원한 것은 무엇인지 떠올리게 합니다.
※ 본 포스팅은 진주시 시민명예기자가 작성한 글로서 진주시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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