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창녕]창녕의 척경비에서 진흥왕을 바라보다! 신라진흥왕행차길
2024년 경상남도 온라인 홍보 명예기자단 강민우
창녕은 옛날 비화가야가 존재했었고 진흥왕 척경비와 여러 석탑들이 창녕 도심에 남아있습니다.
신라진흥왕행차길은 가야정벌과 신라부흥이라는 큰 꿈과 불교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졌던 진흥왕을 따라 그의 업적을 둘러보고 창녕 속의 불교를 만나는 문화탐방로입니다.
첫 번째로 가볼 곳은 창녕박물관입니다. 1996년에 유물전시관 개관하여 창녕의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창녕의 역사를 모두 알아볼 수 있는 곳으로 신라진흥왕행차길을 다니기 전 먼저 방문하면 더욱 재밌게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가보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진흥왕 척경비 원 발견지입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561년 진흥왕이 여러 신료들과 함께 창녕에서 국가적 중대사를 논의하고 그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입니다.1914년 일본인 토리이 류조가 창녕의 고적을 조사할 때 보통학교장 하시모토 료조를 통해 고비석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조선총독부에 조사, 보고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17년 조선고적조사사업의 일환으로 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조사 결과는 대정육년도고적조사보고에 수록하였습니다. 비는 1924년 현재의 만옥정 공원으로 이전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만옥정 공원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이곳에는 진흥왕 척경비와 객사가 있는데 먼저 진흥왕 척경비에 대해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진흥왕이 창녕 지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하면서 세운 비입니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가장 높은 부분이 약 3m이고, 가장 낮은 부분이 1.15m입니다. 비석의 왼쪽 윗부분이 오른쪽 윗부분보다 낮으므로 두 행마다 한 자씩 줄여 새겼습니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으며 전체 643자 가운데 현재 400자 정도가 판독된 상태입니다.
비문의 첫 머리에 신사년 2월 1일 세웠다는 내용이 있어 진흥왕 22년(561)에 세워 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앞부분은 심하게 닮아 있어 판독이 어렵지만 뒷부분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진흥왕 대에 세워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는 첫머리에 모두 순수관경이라는 표현이 있어 순수비라고 부르지만, 이 비석은 이러한 표현이 없어 '척경비'라고 부릅니다. 신라 6부의 명칭과 중앙 및 지방의 중요 관직 명칭, 지방 유력자의 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6세기 신라의 정치, 사회. 제도, 군사적 실상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같이 만옥정 공원에 있는 창녕객사입니다. 객사는 관아의 부속건물 중 하나로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나 외국의 사신을 대접하여 묵게 하던 숙소이자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를 모시던 곳입니다. 창녕 객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창녕군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에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왔습니다.
객사 건물은 가운데 주 건물을 두고 좌우에 날개집이 있는 일반적인 객사의 형태가 아니라 정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되어 있습니다.마룻바닥이 없고 높이 2.85m의 나무 기둥 14개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서까래 이음 부분을 비롯하여 건물 전체에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다음으로 술정리 동 삼층석탑입니다.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결구 수법과 각 부분의 조각 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안정적인 비율을 보이는 전형적인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입니다. 1965년에 석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유리잔 모양의 사리 용기, 유리로 만든 황색 사리병, 사리7과, 향편, 작은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송림사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송림사의 옛터로 밝혀졌습니다. 이 석탑은 당시 수도인 경주 왕경에 세워진 석탑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조각 수법이 정교하고 안정감이 있어 왕경 내 장인을 직접 파견하여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8세기 무렵 경주를 벗어나 왕경 외곽 지역으로 석탑 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문화유산입니다.
다음은 창녕 진양 하씨 고택입니다. 진양 하씨가 대를 이어 살아온 조선시대 일반 살림집인 이곳은 안채와 사랑채, 대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는 초가집으로 모두 남쪽을 향해 있습니다. 안채는 여성 공간으로, 사랑채는 손님을 맞이하는 남성 공간으로, 대문 옆에 있는 대문간채는 주로 아랫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중 안채가 문화유산로 지정되었는데, 안채는 영조 36(1760)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채는 남부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앞면 4칸, 옆면 1칸의 -자 모양의 홀집으로 왼쪽부터 작은방, 마루, 큰 방,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붕은 벗짚보다 수명이 긴 억새풀을 엮어서 얹었습니다. 진양 하씨 고택은 남부 지방 일반 살림집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동쪽에 석탑이 있으면 서쪽에도 탑이 있습니다. 바로 술정리 서 삼층석탑입니다. 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은 이중 바닥돌, 삼층의 몸돌과 지붕돌, 머리 장식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아래층 바닥돌의 옆면을 기둥 모양으로 장식하지 않고 위층 바닥돌 각 면에 2구의 안상을 조각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은 경주 무장사지 삼층석탑과 같은 방법으로 경주의 석탑 기술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2009년 4월부터 7월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발굴 조사 과정에서 탑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 금동 풍경 한 점이 출토되었으며, 석탑이 처음부터 이곳에 세워졌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다음은 직교리 당간지주입니다. 당간지주는 절의 영역을 표시하거나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알리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직교리 당간지주는 두 지주 가운데 한쪽 지주의 윗부분이 작은 기둥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어 다른 당간지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은 인양사 조성비입니다. 창녕 인양사 조성비는 인양사의 건립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비석으로 헌덕왕 2년(810)에 세워졌습니다. 원래는 '창녕탑금당치성문기비'였으나 2010년에 '창녕 인양사 조성비'로 바뀌었습니다. 비석의 북쪽 면에는 승려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고, 남쪽 면에는 탑과 불상 조성 등 여러 가지 불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조성비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지방 사회의 실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다음은 창녕사직단입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 사와 곡식의 신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창녕 사직단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의 사직단 관련 예제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지형적인 여건을 감안하여 다소 변용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단을 쌓지 않고 구릉을 깎아서 만든 점, 북측에는 들로 쌓은 담장이 없는 점, 구릉 전체에 단택을 조성한 점 등은 다른 지방에서 블 수 없는 창녕만의 특징입니다 .창녕 사직단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면서 조선시대 지방 사직단의 지역색을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어, 사직단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다음은 창녕 향교입니다.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을 받들면서, 지역 사회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전통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입니다. 창녕 향교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효종 원년(1650)에 한차례 중건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1987년에 동, 서재를 복원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습니다.
다음은 명덕수변공원입니다.
명덕수변공원은 수변 태크가 조성되어 있어 산책코스로 좋고 가운데 목재 다리로 팔각정에 갈 수 있는 게 특징입니다. 또한 한가운데 분수도 운영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창녕 석빙고입니다.석빙고는 봄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로 겨울에 강이나 하천에서 깨끗한 얼음을 떼어 내 저장하였습니다. 창녕 석빙고는 창녕현 관아에서 만든 것으로, 입구에서 있는 석빙고를 통해 조선 영조 때인 1742년에 창녕 현감이 세운 것임을알 수 있습니다. 석빙고는 차가운 얼음을 일 년 내내 서늘한 기온에서 보관하기 위해 배수와 환기가 가능한 구조를 생각해 낸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문화유산입니다.
마지막으로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중 교동 고분군입니다.
교동고분군 안에 있는 전체 봉분의 절반 이상인 67기가 확인되며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해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무덤도 80여 기 이상 확인되었습니다. 교동고분군에서는 10, 22, 39호 분의 대형 무덤을 중심으로 중, 소형 무덤이 밀집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며, 대형 무덤들 간에 간격을 두고 있어 3개의 작은 군집으로 다시 나누기도 합니다. 교동고분군에서 조사된 대표적인 무덤은 3,10, 39호 분과 52, 54호 표형분입니다. 모두 비화가야의 독특한 무덤 형식인 앞트기식돌방무덤이지만 사용한 석재의 형태를 비롯하여 무덤의 입구를 만든 방식과 흙을 쌓아 올린 방식 등에서 다양함을 보입니다.
이렇게 신라진흥왕행차길로 창녕 도심 구석구석 다녀보며 역사에 대해 배워보았습니다.여러분도 한번 떠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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