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중구의 개항장

개항기 이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외국의 선진문물이 유입되는 통로였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인천 개항장은 국제무역항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각종 상업시설들과

은행, 호텔, 우체국, 무역창고,

그리고 지금의 증권시장 격인

미두취인소도 설치되었습니다.

인천미두취인소

현재 신포사거리 인근

옛 국민은행 자리가 일제강점기 당시

미두취인소가 있었던 자리라고 합니다.

'미두장(米豆場)'이라고

불리던 미두취인소

곡물을 중개하고 거래하던 곳으로

일본이 조선의 미곡 유통시장을

장악하게 되는 역할을 하였는데요.

처음에는 다양한 곡물을 취급했으나

곧 거래품목을 쌀 한 가지로

제한하였다고 하지요.

일제강점기의 인천은

우리나라 최대의 쌀 집산지

가격이 싼 조선의 쌀을 가져다가

일본에 팔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어서

일본 상인들은 너도나도 쌀 무역업과

정미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많은 양의 쌀은

수인선을 통해 인천으로 들어왔고

이때 많은 곡물창고들이 만들어졌으며

미두취인소가 만들어지는 배경이 되었죠.

1896년 인천미두취인소가

처음 설립된 이후 1932년

조선 취인소령에 따라

군산·부산·대구 등지로

확대되었습니다.

당시 인천미두취인소에서는

매달 수백 만석의 쌀 거래가

종이로 오고 갔다고 하는데

하루 거래량이 100만 석을 웃돌면서

일본 선물시장을 추월했을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선물 거래는

상당히 공격적이고 위험한

투자 방식으로 인식되지만

당시 미두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래 설립 목적인 미곡 수급의 안정 및

위험 분산 또는 거래의 안전과 실물 확보 보다

투기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았다고 하지요.

10% 보증금만으로

대량 매매가 가능하고

기한이 되어

청산할 때 시세가 오르면 이익을 보고

그렇지 못하면 손해를 보는 방식으로

그만큼 투기성이 강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대부분의 피해자는

조선인들이었습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일본 선물가격을 기준가격으로 삼았는데

일본 시세를 전보를 통해 미리 알아낸

일본인들이 시장을 농락했기에

조선인들이 이익을 보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웠다고 하지요.

결국 조선인들은

집·논·밭 등을 매매하여 마련한 투자금을

미두장에 투기하여 잃게 되었고

일제 식민지 당국과 일본인 자본가들은

그 돈을 착취해 가는 수탈의

악순환이었던 셈이지요.

그래서 당시 미두취인소 주변에는

“논밭은 동양척식회사에 뺏기고,

조선인 돈은 미두(米豆) 바람에 다 날아간다"라는

말이 떠돌았다는 말이 전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당시의 영화가 상상조차 안되는

인천 미두취인소 터 빈 건물 앞에서

일확천금의 덧없음과 아울러

헛된 꿈을 조장하고 잘 살아보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마저 수탈해갔던

일제의 악행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인천미두취인소터>

※ 본 게시글은 제12기 인천시 SNS 서포터즈 최용석 님이 작성하였습니다.


{"title":"<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 인천미두취인소","source":"https://blog.naver.com/incheontogi/223502349840","blogName":"인천광역시..","blogId":"incheontogi","domainIdOrBlogId":"incheontogi","nicknameOrBlogId":"인천시","logNo":223502349840,"smartEditorVersion":4,"lineDisplay":true,"outsideDisplay":true,"meDisplay":true,"cafeDisplay":true,"blogDisplay":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