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박물관에서 바라본 의령 History(의병, 붉음의 의미 그리고,...)

의령군 블로그기자 조윤희

의병박물관

-주소: 경남 의령군 의령읍 충익로 1-25(지번. 중동리 482)

-운영시간: 09:00 ~ 18:00

-문의: 055-570-2845

의병, 홍의장군, 곽재우 등 어려서부터 익숙한 단어부터 찾게 되는 의령을 여행할 때는 거의 부모님을 모시고 움직이기 때문에 함께 감동할 수 있는 곳을 검색하는 것이 습관이 될 참입니다.

6월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더운 요즘 부모님을 모시고 야외로 다니기에는 죄송해서 이번에는 실내에서도 의령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아온 곳이 바로 의령읍에 위치한 의병박물관이랍니다.

박물관 관람 안내

-관람 시간: 09:00 ~ 17:30

(관람 종료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휴관일: 매년 1월 1일 / 매주 월요일

(단, 월요일이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제2조에 따른 공휴일일 때에는

월요일 다음의 첫 번째 평일)

-안내 및 문의전화: 055-570-2845

-관람료: 무료

고고역사실

더운 바깥과 달리 들어서자마자 다가오는 시원함~

의령을 올 때마다 지나치기만 하다가 안을 둘러본 것은 처음인데 부모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시설을 둘러보시는 것은 처음이라고 하시더군요.

첫 방문을 한 의병박물관은 외형만큼이나 내부의 배치와 고증을 통한 자료들이 저를 구석기 시대로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것 같더군요.

의병박물관이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

의령의 구석기, 청동기, 가야 시대 등 토기나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좀 의아해하기도 했는데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답니다.

기존의 의령군민 문화회관 내에 위치하고 있던 의령박물관을 충익사 기념관(보물 제671호 곽재우 유물 일괄 등 의병 관련 유물)과 합관하여 2012년에 신축하면서 의병박물관으로 명칭을 했다는군요.

9,537㎡의 부지에 연면적 2,752㎡로 사업비 9,776백만 원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지어졌으며, 고고역사실과 의병유물전시실, 특별전시실, 영상실, 수장고 등으로 꾸며져 있답니다.

의령 대의면 마쌍리 출토 파수 부호 등 선사시대 유물과 의령 용덕면 운곡리 고분군, 부림면 경산리 고분군 등 가야 시대 유물을 비롯한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근대로 이어지는 각종 유물과 전적류 등이 시대 순으로 전시되어 있어서 의령의 History를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지더라고요.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지어졌으며, 고고역사실과 의병유물전시실, 특별전시실, 영상실, 수장고 등이 있는 의병 박물관은 방문했을 당시 1층만 개방하여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답니다.

붉은 도포를 입고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곽재우 장군 상이 로비에서 길라잡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고고역사실과 의병유물 전시실 사이에 세워져 있어서 담아보았네요.

의병 유물 전시실

고고역사실 맞은편에 있는 의병 유물 전시실로 걸음을 옮겨봅니다.

‘의병유물전시실’에서는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됐는지, 곽재우 장군을 중심으로 의령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어떻게 나라를 구했는지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하니 찬찬히 둘러봅니다.

의령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곽재우를 중심으로 의병이 봉기한 곳이지요.

의병이란 국가가 징발하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외세의 침입에 맞선 민군(民軍)을 말한다. 우리나라에 의병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해요.

현재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 기록은 조선시대 임진왜란부터이며 그 중심에 의령이 있고 또 그 안을 파고들면 홍의장군 곽재우가 있지요.

곽재우,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길래 의병장이 되었고, 후대에까지 그 이름이 기억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곽재우(郭再祐)에 대하여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인 곽재우는 1552년(명종 7) 8월 28일 경남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그의 외가였고 또한 이곳이 그의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된 곳이지요.

그의 스승이자 영남 유학의 거봉인 남명 조식의 외손녀와 혼인하고 1585년(선조 18) 별시(別試)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지만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다는 이유로 합격 발표한 지 수일 만에 무효 처리가 되었다지요.

그 후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채 고향에 돌아와 지내던 중 4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하인 열세 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고 해요.

그는 집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고 치면서 본격적으로 의병을 모았고, 그해 6월 말에는 정암 나루 부근 솟대 바위에서 왜군과 맞서 싸워 크게 이겼는데,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싸움에 임했기 때문에 홍의장군이라고 불렸답니다.

의병 is...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규군인 관군이 붕괴되자 백성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쳐 일어난 것이 의병인데, 대개 그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적게는 몇십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의 규모로 이루어졌으며, 관군보다 큰 전과를 이룩하였으며, 이러한 의병 활동의 원천은 무기나 병력 등의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충성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결사 항쟁의 정신이었다는 것을 박물관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1592년(임진년) 4월 13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1598년 11월까지 약 7년간에 걸쳐 벌인 임진왜란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일본 민족의 공격을 받아 전국을 유린당한 전면전쟁으로 조선은 물론 일본 그리고 중국에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요.

대표적으로 경상우도의 3대 의병장 곽재우, 김면, 정인홍을 들 수 있는데 모두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였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더라고요.

제가 살고 있는 김해는 조식 선생을 기념하는 산해정이 있어서 그런지 갑자기 의령이 더 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행의(行義)를 누구보다도 강조했던 남명은 당시 이론 지향적 비실천적 학풍은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문인들로 하여금 의병 창의 대열에 앞장서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말이지요.

의병박물관에서 인상 깊이 봤던 것은 낡고 해어진 말안장이었답니다.

16세기 복제품인 이 안장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가 타고 다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말 위에서 의병들을 통솔 지휘하면서 위기의 나라와 백성을 위했던 시간의 잔재에 감사드릴뿐입니다.

임진왜란 소개, 18장군 상징 조형물, 임진왜란 시 의령지역 의병활동 영상, 임진왜란 및 의병 관련 유물, 복식 및 무기류, 18장군 정보검색대, 망우당 곽재우 ZONE, 의를 부르는 붉은 북소리 영상, 의령지역 의병 관련 유물, 정암진 전투 모형, 경상우도 의병 배치도, 영산 전투 영상 등 곽재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조선 관군과 의병 관련 유물, 역사를 전시한 의병유물전시실을 둘러보면서 예전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 위에 덧 입혀지는 지식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더군요.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날이 4월 22일인데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호국 보훈의 달인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지정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의병박물관에서 부모님과 둘러보면서 가족과 함께 오면 참 좋은 공간이다 싶어집니다.

6월인데도 연일 30도를 웃도는 요즘, 시원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시죠?

의령의 역사와 의병 그리고 홍의장군 곽재우의 시간 속으로 다녀올 수 있는 의병박물관에서 시원하게 보내보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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