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 가평의 다크투어리즘에 관심이 있으신 분

♧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장소를 원하시는분

중세유럽 지하교회 카타콤이 연상되는 국내 유일의

공동체생활유적, 적목리공동체생활유적 제2구역 안내

사진.글_가평군청 홍보미디어팀_제5기 파인너트기자단

이전에 먼저 소개해드렸던 '적목리 공동체생활유적(가평향토문화유적제13-1호)'에서는 종교탄압과 일제의 각종 수탈을 피해 깊은 산속 적목리에 터를 잡을 수 밖에 없었던 종교인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한차례 들이닥친 시련으로 인해 기존의 생활터를 뒤로한 채 각자 뿔뿔이 흩어져야했던 '제1구역'에서의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들의 마지막 정착지인 '제2구역'에 대한 이야기를 연이어 소개해드리는 시간을 가져보려합니다. 현재 삼육대학교(이곳의 공동체생활유적은 개신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에서는 해당 장소에 대한 기념관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을 만큼 공동체생활유적은 우리나라의 해방사와 종교사에 있어 굉장히 의미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요, 특히 해방과 관련되어 있는 장소인 만큼 현장을 직접 견학하시면 보다 유익한 학습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니 참고해주시길 바라며 공동체생활구역 제2구역에 대한 소개를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방문안내(2구역)

가는방법

제2구역에 대한 장소요약

방문시 주의사항

대중교통 이용불가, 자가용이용 시 적목용소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내리막길을 따라

3분정도 내려가면 공동생활유적 표지판이 있음.

일제탄압에 맞서 신앙을 지켜내고 나아가

조국해방이라는 염원을 품고 살아간 당시

종교인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도로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햇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깊은 숲속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일몰 전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적목리 공동생활구역은 1구역과 2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각 가평향토문화재 제13-1호와 13-2호로 별도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영역이 넓고 각 영역별 주거형태와 내재된 스토리도 다르니 방문전 내용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초창기 기독교인들의 피난처이자 예배당이였던

카타콤을 연상케하는 적목리 공동체생활구역(제2구역)

일제의 탄압속에서 신앙을 지켜내려는 그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유적들이었습니다

공동체생활구역 제2구역은 제1구역 입구에서 5분정도 더 내려가야하는데요. 이곳에도 문화재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과 입석이 자리하고 있어 장소를 찾는데 어렵움이 없습니다(다만, 해당 장소역시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주차는 적목용소 주차장을 이용하셔야합니다.) 잣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숲속으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도로밖의 풍경과는 전혀다른 분위기를 지닌 장소들이 하나 둘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제1구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는 신도들이 다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 터와 반지하 형태의 움집을 만들었던 터 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일본 헌병의 감시를 피해 바닥을 1-2m 파낸 반지하의 형태로 만들어 그 위에 통나무로 지붕을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마치 초창기 기독교 성도들의 피난처이자 예배당이었던 '카타콤'의 한국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교회의 완전한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일제의 탄압이라는 공포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내려는 그들의 마음과 조국해방이라는 염원이 아직까지도 이곳에 맴도는 것만 같았습니다.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을 확인하시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다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한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공동체 생활유적 곳곳에는 남아있는 터에 대한 설명을 전해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문화유적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데요, 많은 유적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곳은 당시 사람들이 성경책을 숨겨놓았다는 바위였습니다. 해당 장소는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산으로 올라갈때 성경과 찬송과 같은 영감적인 종교서적들을 감추어둔 곳이라고 합니다. 헌병대의 조사를 받고 나서부터는 집안에 종교서적을 둘 수 없어 사진 속 장소와 같은 바위나 돌밑에 서적을 숨겼다고 하는데요, 종교인에게 있어 성경은 목숨과도 같은 것인데 이를 지켜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집니다(적목리 공동체생활유적지에 방문하실때에는 정해진 장소에서만 관람을 하시는 것이 안전하며 돌무더기 위로 올라가거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시면 사고발생의 위험이 있으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한반도 유일의 집단항일신앙 공동체

유적지인 가평군 적목리 공동생활유적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과도 같았던 일제강점기였지만, 3천만 조선인들의 바람대로 결국 광복이 찾아오게 되는데요. 당시 통신수단이 전무했던 터라 가평군까지 광복소식이 전해지는데에는 무려 7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오로지 신앙심으로 버텨왔을 적목리 공동체 사람들에게 해당 소식은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데요, 이로서 모든 교인들은 한 곳에 모여 해방감사 기도를 드리고 기나긴 산속생활을 마치고 적목리를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1950.8.22). 약 2년의 시간을 깊은 산속에서 보낸 신앙공동체, 일제의 탄압을 피함과 동시에 혹독한 자연환경을 견디는데 있어 2년의 시간은 결코 짧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종교의 여부를 떠나 당시 시대상을 체험할 수 있었던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적목리 공동생활유적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집단 항일 신앙공동체 유적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는데요, 수많은 계곡들이 즐비해 여름철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는 가평의 피서명소 북면에 이같은 장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분들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크투어리즘과 가평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는 장소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은 적목리 공동체 생활유적을 방문해보시길 바라며 이상 글을 모두 마칩니다.

※ 본 게시물은 가평군 SNS 서포터즈가 작성한 글로 가평군과 공식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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