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일까요. 10년도 훨씬 지난 옛날에 영화를 하나 보았는데요.

조선시대 임진왜란의 혼란한 상황에서 세상을 뒤엎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키우고 친구는 물론 오랜 연인인 백지마저 버린 채,

세도가 한신균 일가의 몰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란의 칼을 뽑아 들면서 그렸던 영화입니다.

홍성에 가면 임득의 장군이라는 사람의 묘가 있는데요.

그 임득의가 바로 영화 속의 주인공

이몽학의 난을 제압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자주 홍성을 가면서 임득의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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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임득의 장군의 신도비와 묘가 자리하고 있는 곳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 그 혼돈과 광기의 시대 임진왜란의 기운이

조선의 숨통을 조여 오고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가던 선조 25년의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임득의는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자방(子房). 북병사(北兵使) 임준(林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랑 임정수(林貞秀)이고, 아버지는 부사 임식(林植)라고 합니다.

​임득의 장군 묘역이라는 표시가 보입니다.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이 충청도 홍산에서 승속군(僧俗軍) 600∼7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자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신경행(辛景行) 등과 함께

홍가신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지리가(地理家)의 말에 따르면

동남쪽을 신도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몽학의 난을 잠재운 홍가신은 청난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박명현과 충청수사 최호는 2등, 임득의 신경행 등은 3등에 봉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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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 후에 날이 시원해지는가 싶더니

이날은 약간은 덥다는 느낌이 드는 날이었습니다.

임득의 장군의 묘는 양지바른 곳에 잘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이몽학은 죽었지만 그 여파는 단순하게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파싸움으로 최소한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한 여파는 백성들에게 그대로 미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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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고 나서 그 흔적을 따라가는 것은

그 사람의 행적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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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은 홍산(지금의 부여군 홍산면)에서 거병 후 홍산을 비롯해

주변 여섯 고을을 점령한 후, 홍주(홍성의 옛 지명)로 진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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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목사 홍가신은 지역 무장인 박명현, 임득의와 종사관 신경행,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홍주읍성을 지키면서 이몽학을 격퇴하게 됩니다.

이후 사기가 떨어진 반란군은 이몽학을 제거하고 투항해 반란이 진압됐습니다.

임득의 장군을 기리는 정충사는 잘 정비되어 있어서 깔끔한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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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이 봉행된 정충사는 충청남도 문화재 제340호로 지정돼 있고

장군 묘역이 있으며 관내 금마면 장성리 금마총(말무덤)에는

장군의 전승비인 홍양 정난비와 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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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광해군 1)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된 임득의 장군의 초상화는

보물급 영정으로 정충사에 보관돼 있다가 현재 충남역사박물관에 옮겨져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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