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을 평가할 때면 당시의 사회상이 큰 영향을 받곤 합니다.

태평성대라면 순수하게 업적을 기리겠지만

나라가 어지러울 때라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분하게 되네요.

평택시 청북읍 고잔리에서는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신숙주를 만납니다.

도로를 벗어나 마을 길을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소박한 풍경 사이로 홍살문이 보입니다.

신숙주 사당은 고령 신씨 사당인 고잔모재로 시작됩니다.

정면으로는 낱알이 패인 농경지입니다.

햇살을 한껏 머금고는 하루하루 낱알이 영글어 가겠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8월 말 농촌 들판은 벌써부터 가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신숙주는 1417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나 1438년 세종 20년에 진사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였고

1439년 8월 생원시에 9월에는 문과에 3위로 급제하였습니다.

1441년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어서는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을 세우는 등 집현전의 대표학자로 활약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종 사후 단종의 즉위를 알리는

중국의 사은사가 되어 수양대군과 함께하면서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결국 계유정난에 동참하여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와 함께하였습니다.

보한재집 등의 많은 책을 저술하고 정치적으로도 성공하였으나 후대의 평가는 나눠지네요.

신숙주를 생각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날씨에 민감하여 쉬이 변하는 숙주나물을 떠올리는 이유입니다.

사당에 도착하여서는 57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통해

조선 전기의 시대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신숙주는 나주에서 태어나 묘역은

의정부에 있으며 사당은 이곳 평택에 위치하였습니다.

본디는 의정부 묘역 옆에 있었으나 노후화되면서

훗날 장자 후손의 집계지인 이곳 평택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하네요.

홍살문 너머 좌우로 총 3개의 비가 조성되었습니다.

문충공 고령 신숙주 선생 한글 창제 사적비와 비석, 보한재 신숙주 선생 문학비입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쎄, 꽃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무른 가마래 아니 그츨쎄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이 새겨졌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였습니다.

사당, 향교, 서원 등에 흔하게 식재되었던 향나무와 배롱나무도 보입니다.

두 종류의 나무는 선비 정신과 기개 상징하곤 하네요 계단 끝 언덕 위로 솟을

삼문의 영모문이 있고 안쪽으로 고잔묘가 있습니다.

고잔묘에는 신숙주, 신항, 신의 3위의 위패와

신숙주 영정 진본을 베껴 그린 영정이 모셔졌습니다.

또한 신주를 모셔두는 감실과 신주를 넣어두는 나무궤 감실주독도 안내됩니다.

하지만 영모문이 굳게 닫혀서는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영모문 앞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너무도 평화롭습니다.

신숙주의 파란만장했던 삶이 죽어서는 편안해진듯합니다.

신숙주 사당은 고령신씨 사당과 함께하며 꽤 큰 규모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23일, 6월 22일에는

신숙주의 제사를 음력 2월 19일, 10월 30일에는

신항의 제사를, 음력 정월 24일, 8월 13일에는 신익의 제사가 올려진다 합니다.

제사가 올려지는 날이면 활짝 열려 영정과 감실주독도 만날 수 있을듯하네요.

신숙주 사당은 1년에 6번 제삿날에는 조금 특별하게,

평소에는 조선 전기 한글 창제와 계유정난의 역사를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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