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79주년 기념, 임진왜란 조선 포로 집단거주지 일본 교토의 '진주섬'
교토 요도강변 포로들이 사는
진주시마(진주섬)가 있었다
신유한의 '해유록' 中
올해로 79주년을 맞이한
8·15 광복절을 기념하여
1593년 2차 진주대첩으로 인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애국심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간
진주섬 포로들의 이야기를 소개드립니다.
진주섬, 10만여 명의 조선 포로
포로에서 영웅이 되다
1719년 일본 교토에는
조선인 포로 집단거주지인
'진주섬'이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1719년 제9차 조선통신사 신유한이 남긴
<해유록>에 남겨진 이 기록 속 '진주섬'은
임진왜란 당시 두 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 전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1593년 2차 진주대첩에서
8만여 명이 넘는 포로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지막 성인
후시미성 남쪽 요도강변 근처에
진주섬(진주시마)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 중에는
자신만의 기술을 살려
음식, 도자기, 공예, 학문, 종교 등
조선의 선진 기술과 문화를 일본에 전파시켜
일본 문화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어느 일본 학자는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희생을 치러가면서
조선에서 유학을 했다.
우리가 그만큼 조선의 문물을 배웠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12살의 진주 소년,
역관이 되어 통신사로 파견,
100여 명의 포로를 조선으로 데려오다
지피지기, 백전불패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지지 않는다.
12살의 나이에 일본 포로로 끌려간
강우성은 포로 신분에도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익혀
일본어 교재의 시초격인
<첩해신어>를 저술하였습니다.
10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첩해신어>는
왜관과의 사적인 대화부터
통신사 파견을 준비하는 과정,
통신사 업무 수행하며 이뤄졌던 대화 등
통신사로서 업무 전반을 다루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우성은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역과 과거에 합격해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00여 명의 포로를
조선으로 데려온 포로출신 역관
강.우.성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끈질기게
조선에 외교 정상화를 요청했습니다.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인 조선은
200여 년의 기간동안 9번의
조선통신사를 파견했습니다.
(※ 3번의 회답겸쇄환사와 9번의 통신사 파견)
초창기 통신사의 주요 업무는
포로를 조선으로 데려오는 일이었습니다.
강우성은 역관으로서 세 차례에 걸쳐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역관 강우성은 뛰어난 일본어 실력과
포로 경험을 통해
일본 현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조선 조정의 두터운 신뢰 속에서
남다른 활약을 펼쳤습니다.
강우성은 다른 역관과 달리
갈 수 있는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포로를 모아 조선으로 데려왔습니다.
3번의 통신사 파견을 통해
그가 조선에 데려온 포로의 수는
100여 명이 넘습니다.
기록으로 남겨진 임진왜란 속
알려지지 않은 역사인 '진주섬'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포로들의
행적을 쫓아 그들의 삶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일본이라는 진흙 속에서도
영롱한 빛을 잃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의
이름을 새롭게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자료출처 : SCS 서경방송)
▼ '진주섬' 자세히 보기 ▼
가혹한 운명과 혹독한 삶에도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고 활약을 펼친
진주섬의 포로들을 애도하며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
유구한 역사 속에 일본에 의해 희생된
선조들의 넋을 기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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