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 빛깔 잃지 않고 각기모여 하나 되니

비빔세상, 상생화합이로다

* 본 이야기는 최기우작가(최명희문학관 관장)의

거리극 <녹두장군 한양압송 차(次)>에서 영감을 얻어

픽션(상상)을 더한 내용으로 글 흐름 상

구어체로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전주비빔밥

농업은 원포인트 점이 아니다. 시간이고 공간이며, 역사다. 사람들이 남기는 무늬의 총합이다. 음식은 농업을 씨줄·날줄로 연결한다. 사람들의 생각에서 ’날것 그대로 건져 올리는 보물‘이다. 모든 음식은 '그때' '거기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일 때 제맛을 낸다. 거기에 더하여 시대의 염원(간절함)이 한곳에 모아진 이야기 옷을 입으면 그 음식은 시대를 관통하는 ‘기반 기억’으로 작동하며 ‘인문학적 통찰’이 된다.

박홍규, 피노리 가는 길, 2014, 45×105cm, 목판화/ @출처 : 한국농정신문

1894년 12월 2일(음력),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재기를 노리며 퇴각 중인 녹두장군 전봉준이 순창 피노리 장터 주막에 머무르다 옛 부하(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된다. 민보군을 조직하고 있던 선비 한신현은 장정을 동원해 주막을 덮쳤다. 낌새를 눈치챈 전봉준 일행은 담장을 넘어가다 마을 장정들의 개머리판과 몽둥이에 사정없이 폭행을 당한다. 전봉준은 발목과 허리를 다쳐 꼼짝할 수 없었다. 무지한 장정들이 죽지 않을 만큼 몽둥이찜질을 해댄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순창 소모사 임두학은 절차에 따라 그들을 전라 감영으로 압송하려 했다. 하지만 근처에서 동학군 토벌 작전을 벌이고 있던 미나미 고시로는 전봉준의 신병 인도를 요구한다. 임두학은 일본군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서로 공동으로 지켜 서울로 압송하기로 한다. 만약 전봉준이 전주로 압송되었다면 김개남 장군처럼 현장에서 즉결 처분으로 죽임을 당했을 공산이 크다. 다음날, 담양에서 일본군에게 인계한다.

서울 종각역 6번 출구 전봉준장군동상과 전옥서터 표지석

1번 국도를 따라 전주를 경유하여 보름여를 걸려 12월 18일, 서울 의금부 전옥서로 압송된다. 일본군은 대포와 총을 앞세워 삼엄한 경비를 펼치며 죄인들을 호송했다. 가족들은 물건을 이고 지고 행렬의 뒤를 따랐다. 이 장면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대단원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조선 정부와 일본군은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전국 곳곳에 방문을 내걸어 알렸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빅뉴스였다, 사람들은 땅을 구르며 통탄했고 밀고자 김경천은 세상 눈총이 무서워 몸을 숨겼다.


한 가지 질문,

그렇다면 이 압송 기간 동안 당시의 민중들은 가만히 손 놓고 있었을까? 아니다. 한반도 전체가 들끓어 투쟁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의 최신식 기관총과 무기 앞에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민심은 내면 깊숙이 녹아들고 응축되었을 것이다. 혁명군 잔여세력과 백성들은 두 가지를 시도했다.

하나는 전봉준 장군 구출 작전이다. 엄중한 무기체계로 호송하는 길이지만 민중들은 보름 동안의 여정에서 틈을 노리고 전봉준 장군 일행을 구출하려는 작전을 개시한다.

두 번째는 압송 차량 올라가는 길목마다 민중들은 음식과 마실 거리, 의복 등을 정성 들여 공양했다.

전봉준 장군 법정 출두 사진 / @출처 : ssmile9431블로그

전주를 경유할 무렵 어느 점심때,

전주천변 근방 사람들은 하얀 쌀밥, 오방색(적,청,황,흑,백)을 포함 사방팔방 10여 가지 제철 채소와 고명, 달고 매운 고추장 한 숟가락 척 올린 양푼밥을 즐겨먹었다. 영양도 만점일 뿐 아니라 눈으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한 농부 내외가 두 손으로 정성스레 전봉준 장군과 일행에게 이 양푼밥을 공양한다.

오방색 양푼밥



계란꾸러미

비빔밥을 비비다

사람들은 녹두장군이 말씀하신 ‘비빔세상’ ‘상생화합’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들이 먹던 양푼밥에 계란 노른자 얹어 새로운 음식에 의미를 부여하고 ‘비빔밥’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한편,

황해도 청년접주 20살 청년 김구는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호송대를 습격하여 전봉준 일행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포박당한다. 그는 황해도 해주 팔봉 접주로 동학혁명의 청년지도자였다. 그때 또 다른 일행이 작전에 성공하여 전봉준 압송 차 앞까지 다가선다.

계란 노른자가 들어간 전주비빔밥

(좌) 전봉준(1855~1895), (우) 김구(1876~1949) / @출처 : 네이버

전봉준은 구출하고자 온 동학군 손을 잡으며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네.

나는 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가 없다.

내 시대는 끝났다. 이제 저 청년을 구해

다음을 기약하라.

- 전봉준 장군 -

장군의 명을 따라 그들은 청년 김구 일행을 극적으로 구출하여 사라진다. 전봉준의 압송 차량은 서울로 올라간다. 이때 전봉준은 1855년생, 나이 41살, 청년 김구는 1876년생으로 20살이었다.

전주비빔밥은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과 김구 선생의 연결고리이면서 동시에 지금 우리들의 삶 결하고도 정에 맞는 음식이다. 전주비빔밥이 맛있는 까닭은 전북에서 벌어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기반 기억, ‘동학농민혁명의 지향’이 담긴 음식이기 때문이다.



글, 사진=안병권 기자

사진 = 네이버

{"title":"[역사, 그리고 이야기 농업] #3. 동학농민혁명과 전주비빔밥","source":"https://blog.naver.com/jbgokr/223417228614","blogName":"전북특별자..","blogId":"jbgokr","domainIdOrBlogId":"jbgokr","logNo":223417228614,"smartEditorVersion":4,"meDisplay":true,"lineDisplay":true,"outsideDisplay":true,"cafeDisplay":true,"blogDisplay":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