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화성시 SNS 시민홍보단이 취재한 기사입니다."

안녕하세요!

화성시 SNS 시민홍보단 이재형입니다.

경기도 화성시는 정조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든 융건릉과 용주사 등 역사적인 명소가 많습니다.

화성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남이장군윤계 선생입니다.

남이장군은 잘 알려진 인물인데요, 윤계 선생은 처음 들어보신 분도 많을 겁니다.

오늘은 화성 역사 여행으로 남이장군 묘윤계 선생 순절비를 소개하겠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남이장군 묘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

내비게이션으로 ‘남이장군 묘’를 검색하면 두 곳이 나옵니다.

한 곳은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에 있는 묘고, 또 한 곳은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묘입니다.

두 곳 중 어느 묘가 진짜 남이장군 묘일까요? 정답은 화성시에 있는 묘입니다.

남이섬에 있는 묘는 가묘이며, 남이섬 이름 때문에 상징적으로 만든 가짜 묘죠.

진짜 남이장군을 만나러 화성시 비봉면으로 향했습니다.

남이장군이 있는 곳이라 도로 이름도 ‘남이로’이고요, 입구에 관광안내판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550m 더 들어가면 남이장군 묘를 볼 수 있습니다.

남이장군 묘가 있는 남전리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인데요, 전원주택도 많습니다.

남전리는 논과 밭이 많은데요, 들녘을 보니 벼가 누렇게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고 있네요.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남이장군 묘는 주차장이 아주 넓습니다.

제가 평일에 가서 그런지 주차에 여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주말과 휴일에 와도 주차 걱정은 없겠습니다.

주차장 안쪽에 남이장군 약력을 소개한 안내판이 있습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남이장군은 태종 이방원의 외종손이자 세종대왕의 조카였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명문가 집안의 자제입니다.

그런데 참 억울하게 죽었는데요, 그의 억울함을 달래주러 묘소로 가보겠습니다.

주차장에서 남이장군 묘소까지는 약 220m입니다.

묘소로 가는 길에 근사한 전원주택이 있고, 예쁜 꽃들이 가을하늘과 대비되어 한가로운 농촌 풍경을 보여줍니다.

전원주택을 지나면 남이장군 묘 안내판이 나옵니다.

처음 오는 사람도 묘소를 찾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안내판이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묘소는 계단을 좀 올라야 하는데요,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힘들지는 않습니다.

가을 햇볕이 조금 따가웠는데, 나무 그늘이라 덥지 않게 올라갔습니다.

묘소 입구에 남이장군 안내판이 또 있습니다.

묘소에는 문인석, 망주석 등이 있습니다.

묘소를 보니 묘가 두 개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인과 함께 있는 쌍분입니다.

남이장군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13호입니다.

앞서 주차장에 남이장군 생애를 기록한 안내판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 내용을 요약해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남이장군은 의령 남 씨로, 조선 전기의 무신입니다.

태종의 부마였던 남휘의 손자인데요, 세조 6년(1460)에 무관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26살에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장관)가 되었다니 놀랍습니다.

그러나 너무 잘 나갔나요? 1468년 예종이 즉위한 뒤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었고, 유자광의 무고로 처형되었습니다.

약관 26세에 죽다니! 너무 안타깝네요.

천하를 움켜쥘 듯한 기개는 물론 총명함까지 갖춘 장군이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은 억울한 일이겠죠.

백두산 돌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頭滿江水飮馬無)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後世誰稱大丈夫)

- 남이 장군

1467년 여진족 추장 이만주를 척살한 뒤 남이 장군이 남긴 시(詩)입니다.

이 시를 읽으니 그의 기개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유자광이 남이 장군을 역모죄로 모함하면서 이 시의 ‘평(平)’ 자를 ‘득(得)’ 자로 바꾸어

“남자가 이십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바꿔 역모의 증거로 악용해 결국 죽음을 맞게 된 거죠.

순조 18년(1818)에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청으로 관직과 작위가 복위되었으며, 충무공 시호를 받았습니다.

늦게라도 남이장군의 명예가 회복되어 다행입니다.

묘비 우측에 있는 비석에는 “병조판서충무공남이장군지묘(兵曹判書忠武公南怡將軍之墓)”라 쓰여 있습니다.

묘비 좌·우측과 뒷면에는 남이 장군의 생애와 관직 그리고 공적이 빽빽이 적혀 있는데요, 한글로 적혀 있어 이해하기 쉽습니다.

조선시대에 반역 죄인은 후손들이 묘를 만들 수 없게 했습니다.

하지만 후손들은 남이 장군 시신을 수습해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산 145번지 일대)에 묘를 몰래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남이 장군은 화성에서 편히 잠들어 있습니다.

충절의 상징 윤계 선생 순절비

경기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1392-1

남이장군 묘에서 약 7km 떨어진 곳에 윤계 선생 순절비가 있습니다.

화성에 있는 역사문화재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윤계 선생도 잘 모를 겁니다.

윤계는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충절을 지킨 관리였습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화성에 있었다니 우리가 꼭 알아야겠죠?

남이장군 묘를 본 후 남양읍 남양리에 있는 윤계 선생 순절비를 찾았습니다.

순절비(殉節碑)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나 애국지사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를 말합니다.

순절비를 보니 남이장군 묘에 비하면 작고 초라한데요, 안내판에 나온 이력을 보니 대단하신 분입니다.

윤계(1583~1636)는 인조 14년(1636) 12월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남양 부사(지금의 화성시장)였습니다.

윤계는 청나라 병사가 남양부에 침입했을 때 근왕병을 모집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임금을 지키려다

적의 기습을 받아 의연하게 대항하다 순국했습니다.

청나라는 윤계에게 귀순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끝까지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순절비를 세운 것입니다.

순절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순절비는 현종 9년(1668)에 세워졌는데요,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민유중이 ‘부사 참판 윤공 순절비’라고 글씨를 썼습니다.

비석이 오래되어 글씨는 잘 보이지 않지만, 윤계 선생의 공적을 적었을 것입니다.

윤계 선생은 경기도 용인시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화성에 순절비가 세워졌을까요?

그가 화성시 남양부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세운 겁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라고 했는데요,

윤계 선생은 순절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후손 대대로 추앙받는 충신이 됐습니다.

윤계 선생 순절비 바로 옆에 대형 베이커리카페가 하나 들어섰습니다.

최근에 오픈했는데요, 높은 곳에 있어 전망도 좋고 깔끔해 한번 방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남양읍에 갔다가 알게 된 소식 하나 전하겠습니다.

남양읍에 물꽃마을이 있는데요, 9월 25일(수) 창문아트센터에 축제를 엽니다.

시간 되시면 가서 축제를 즐겨보세요!

지금까지 화성시 역사여행으로 남이장군 묘윤계 선생 순절비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화성은 인구 백만이 넘는 특례시답게 역사와 전통이 곳곳에 살아 있습니다.

그중 제가 소개해 드린 남이장군 묘와 윤계 선생 순절비를 찾아 자랑스러운 화성의 역사여행을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화성시 시민홍보단

이 재 형


*본 포스팅은 화성시 SNS 시민홍보단에 의해 작성된 글로, 화성시청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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