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라는 것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파가 만들어지고 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중에 남당학파가 있는데요. 남당학파의 시작은 한원진에서 시작이 되어

여러 사람에게 이어졌다고 합니다.

한원진, 정혁신, 이건운, 이돈필, 김복한 선생으로 이어지고

김복한 선생은 홍주의병을 일으킨 분이라고 합니다.

홍주성역사관에서는 갈산면에서 세거하는 안동김씨 수북공파 가문 출신인

김복한 선생에 대한 전시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6월 24일부터 12월 31일까지 진행되는 특별기획전은 지산 김복한 선생의

나라 사랑 정신과 독립운동 활동상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고 합니다.

홍주성 역사관에서는 총 31건 39점의 생전 유품과 자료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이번 특별전은 김복한 선생의 삶과 발자취를 생생히 만나볼 수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당 한원진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아 남당학파의 대표 유학자가 되었으며,

훗날 순종 황제로 즉위하는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에 발탁되기도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산 김복한 선생의 대표적인 운동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설과 함께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참수(斬首)를 청하는 소를 올려 투옥되었고

1906년에도 민종식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합니다.

지산 김복한 선생의 생애 연표를 보는 것은 한 사람의 연대기를 한 번에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갈뫼에서 난 척화파의 후손이라는 김복한 선생은 1907년 의병은닉과

민심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는 도중에 일본 순검에게 무수히 구타당해

그 후유증으로 평생 식사와 용변을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해야 했다고 합니다.

척화라는 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당시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그의 삶을 기억하는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각종 역사적인 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그중 홍성 향토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된 유교 부식회 취지서도 있는데요.

옛날에는 유교가 크게 성행하고 도덕을 숭상하여 유교의 교화 속에 둘러싸여 있으나

근래에 변화에 관한 내용에 물들지 않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인도라는 잡지가 창간되기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네요.

홍성 향토문화유산인 인도라는 잡지의 창간호입니다. 사람의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종묘사직을 위하고 중화의 맥을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만 번의 죽을 고비에서 겨우 살아나는 계책을 내어 창의하려는데,

어찌 평소에 규정에 따라 뜻있는 선비를 책만 하면서,

천지와 만고에 걸친 큰 의리를 허락하지 못하겠습니까?"

- 1차 홍주의병 당시 홍주부관찰사 이승우를 설득하며

그렇게 100여 년 전의 독립을 생각했던 김복한 선생은 일제의 감시 속에

두문불출하다가 1919년 3·1운동 뒤 영남의 곽종석과 함께 호서의 유림을 대표하여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 장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1924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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