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아닌 일상 속 기념을 위해, 창원 웅동 3·1운동기념비
달력 속에는 기념일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특정한 날을 지정하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달력 속 기념일이 그래서 참 많습니다. 기념일에는 대부분 기념행사를 하며 의미를 되새기며 잊지 말라 다짐합니다. 오가는 부산신항과 진해구청을 이어주는 진해대로 찻길 속에서 만나는 웅동 3·1운동 기념비도 우리에게 그날의 함성을 들어보라고 우뚝 솟아 있습니다.
기념비 앞 제단에서 고개 숙여 예를 올렸습니다. “여기 우리 민족의 강렬한 조선 독립의 함성이 메아리친 역사의 고장 1919년 기미년 4월 3일 일제의 서슬 시퍼런 총칼 앞에 누구도 굴하지 않았다.~”
1919년(기미년) 4월 3일(음력 3월 3일) 마천동 냇가에서 계광학교 주기용·배재황·허전 선생을 비롯한 김창업·정운조·김중환·문석주·김석환·김병화·김진찬·주국녕·주기선·김조이·주녕옥 등과 시민, 학생 3,000여 명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날 오전 11시 무렵, 웅천현 읍성의 동문과 옹성 사이에 있던 쇠전(우시장)에서 김창업이 군중 앞으로 나가 연설한 후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그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삼창하고, 정기부가 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동문에서 서문 거리를 오가며 만세 시위를 했습니다. 만세 시위대가 나발등 고개를 넘어가자, 웅동지역 시위대가 성내동으로 밀려 들어와 합류했습니다.
웅동과 웅천시위대가 한목소리로 외친 “대한 독립 만세” 소리에 웅천 하늘과 땅이 뒤흔들렸다고 합니다. 일제 헌병과 일본 거류민들이 총검으로 비무장 만세 운동을 하던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기용·이부근·김일성·배종인·이원우 등 6명의 중심인물을 포함한 32명의 시위자가 일제에 체포되었습니다.
주기용은 1년 6개월 형, 이부근·김일성·배건수·배종인은 1년 형, 이원우는 6개월 형을 받아 마산형무소에 투옥됐습니다. 정운조·문석주·김병화는 3개월의 구류 처분을 받았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 총각 낭군 주려고 구운 떡을 / 독립군 오도록 기다리네 /조선의 독립 다 되었네!
당시 산에 오르는 나무꾼 사이에 불린 노래입니다.
뒤편에는 기미독립선언서가 새겨져 찬찬히 읽었습니다.
곁으로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잠시 그분들의 희생을 기렸습니다.
이어서 옆에 서 있는 장영실 공덕비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공덕비 앞에는 ‘의에 살고 의에 죽자~’인근 웅동고등공민학교 교훈이 새겨져 있습니다.
운동 고등공민학교는 1908년 설립된 계광학교이 독립운동 등으로 1933년 폐교되었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웅동고등공민학교(중학교 과정)’로 부활한 현재의 웅동중학교입니다.
주위로 여름이 왔다고 알려주는 배롱나무꽃이 피었습니다. 붉은 꽃은 '변하지 않는 마음(단심·丹心)'을 드러납니다.
덩달아 맞은편 무궁화들이 이들의 고귀한 정신을 잊지 말라고 붉은빛으로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여기 창원 진해구 웅천지역은 웅천왜성·명동왜성·안골왜성·자마왜성 등과 웅천도요지 등 조선시대 유적지가 있습니다. 또한, 함주기철 목사 기념관, 여성 해방 운동가 김조이 생가지, 김달진 문학관 등 인물들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수탈과 항거의 장소입니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웅천교회-주기철 목사와 김조이 생가-마천 계광학교-마천 3·1운동 기념비로 이어지는 ‘순교와 저항의 길’을 걸어보며 그날의 함성과 정신을 떠올리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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