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보았네 백제의 순간, 오금산성
익산토성,
오금산성이 되기까지
사람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갖게 되는 게 이름이다. 이름은 명명과 동시에 대상에게 고유성과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기에 함부로 지어서도 안 되고 아무렇게나 대해서도 안 된다. 이름 자체가 ‘나’이면서 ‘역사’이기 때문이다.
익산토성이 이달 중 오금산성으로 바뀔 예정이다(8월 말 기준). 몸에 맞는 옷을 입었으니 마음껏 뽐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새 이름을 얻기까지
오금산성은 익산 금마면 서고도리 산50-3에 머문다. 이름 그대로 오금산 구릉에 위치한다. 오금산은 백제 무왕이 다섯 덩어리 금을 얻었다는 전설의 공간이다.
계곡을 따라 포곡식(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으로 지어진 산성은 둘레 690m, 내부 면적 2만 6400㎡ 내외이다. 성벽 높이 4m, 너비 5.5~6m이다. 초기에는 토성을 쌓았다가 나중에 석성으로 축조했다. 성곽 안에는 좁은 배수로와 백제 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저장 구덩이가 있다. 5월에는 직경이 동서 9.5m, 남북 7.8m, 최대 깊이는 4.5m에 이르는 원형의 석재 집수시설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시대별 다양한 유물이 나왔는데 백제 유물로는 벼루 조각, 세발토기 조각과 석재 집수시설, 칠피갑옷 조각, 백제 문서 보관법을 알려 주는 봉축편이 있다. 봉축편에는 ‘정사(丁巳) 금재식(今在食)’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정사는 백제 후기 전성기인 597년 혹은 657년을 의미한다.
통일신라 때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킨 보장왕의 외손자 안승이 신라로 망명하자 문무왕이 그를 이곳으로 보내 보덕국의 보덕왕으로 세웠다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 유물도 여러 점 출토되었으니, 이곳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오랜 세월 중요 거점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왕의 꿈이 깃든
익산 왕궁리에 가면 한때 무왕이 백제의 수도를 옮기려고 지은 왕궁이 있다. 지금은 터만 남은 자리에 단아하고 정갈한 모양의 5층석탑만이 그때의 영광을 보여 준다.
오금산성은 왕궁터와 아주 가깝다. 왕궁 가까운 곳에 산성을 쌓아 수도를 수비하려고 했다. 실제로 이곳에 오르면 지금의 익산 금마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누가 보아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성으로 쌓았다가 나중에 석성으로 쌓은 것도 수비를 더 강화하려는 의도다. 그래서 익산토성이 아닌 오금산성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 게다가 오금은 백제 무왕과 관계가 깊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오금산성은 유네스코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지 않는다. 선정 당시 관련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이후로 백제 후기의 역사를 증명하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앞으로 어떤 귀한 유물이 더 나올지 설레는 마음이다.
그게 무엇이든 역사가 들려주는 따끔한 충고로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아갈 지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글, 사진 = 전북특별자치도청
사진 = 국가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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