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한 봉지 솜과자였다가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였다가

한때 나는 좌판에 던져진 햇살였다가

중국집 처마 밑 조롱 속의 새였다가

먼 먼 윤회 끝

이제는 돌아와

오류동의 동전

「오류동의 동전」, 박용래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시 한 편으로 시작했습니다. 「오류동의 동전」이라는 작품은 세상을 돌고 돌아 다시 오류동으로 돌아온 동전이 주인공입니다. 사전에서는 '윤회(輪廻)'를 '죽어도 다시 태어나 수레바퀴가 돌고 돌아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사상'이라고 풀이하는데요.

한 봉지 솜과자에서 한 봉지 붕어빵이 되고 좌판 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조롱 속 새 한 마리로 변신한 동전은 앞으로 무엇으로 거듭나게 될까요? 어려운 낱말 하나 없이 단 일곱 줄의 짧은 글로 오래오래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오류동의 동전」을 쓴 박용래 시인을 아시나요? 박용래 시인은 우리나라 서정시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H대리점 바로 앞에 '박용래 시인의 옛 집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대전도시철도 1호선 오룡역에서 서대전네거리역을 잇는 계룡로에서 박용래 시인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쉰여섯이라는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17년 동안 머물며 창작열을 붙태웠던 곳이 바로 오류동 149-3번지거든요. 타슈를 타고 달리다 H자동차 대리점 앞에서 '박용래 시인의 옛 집터'라는 표지석을 발견했답니다.

박용래 시인은 1925년 음력 1월 14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읍 본정리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바로 위의 누이와 열 살 터울이 지는 늦둥이 막내아들이어서 누이 손에 자랐다지요.

시인은 1943년 강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중앙은행 경성 본점에 입사하고 1944년 5월 대전지점으로 전근 오면서 대전에서의 삶을 시작하는데요. 해방 이후 은행일을 그만두고 1945년부터 호서중학교와 보문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습니다.

박용래 시인은 1946년 정훈, 이재복, 박희선, 하유상, 원영한 등 지역 문인들과 '동백시인회'를 만들고 동인지 『동백』을 간행하며 시인의 길에 들어섭니다. 은행원이 되었지만 돈과는 맞지 않았고 선생님이 되었지만 월사금 독촉하는 것이 싫어서 결국 가난한 시인의 삶을 선택하셨지요.

표지석을 통해 시인의 삶과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서른한 살이 되던 1955년은 시인에게 중요한 해입니다. 친구의 중매로 이태준 여사와 결혼하는 한편 등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게 되거든요.

지금이야 다양한 매체로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세상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진정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해야 했습니다. 특히나 『현대문학』은 1955년 1월에 창간하여 지금까지 단 한 번의 결호 없이 발간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월간 순수 문예지인데요.

박용래 시인은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 <황토길>, <땅>을 연이어 발표하고 박두진 시인에게 추천받아 등단합니다. 참, 박두진 시인은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로 시작하는 <해>를 쓰셨습니다. 박용래 시인에 대해 공부할 수록 국어시간에 배웠던 시인들이 꼬리에 꼬리에 물듯 등장합니다.

시인의 옛 집터는 H대리점 건물 뒤 공영주차장 안에 있습니다.

시인이 대사동에서 용두동을 거쳐 1963년 오류동에 자리 잡고 1980년 작고하실 때까지 숱한 명작이 탄생하는데요. 그곳이 바로 오류동 149-3번지에 있던 청시사(靑柿舍)입니다.

대문 앞에 감나무가 있어 '푸른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 작은 집에 '청시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데요. 마당에 꽃과 나무가 많았다는 이 집은 당대의 문인과 화가들이 드나들며 예술을 논하던 사랑방이 됐답니다.

옛 집터 기념비를 찾으려면 공영주차장 안으로 쑤~욱 들어가야 합니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저녁 눈」, 박용래

박용래 시인은 1969년 첫 시집 『싸락눈(오늘의 한국시인선집])』을 내고 <저녁 눈>으로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하는데요. 어느 겨울 늦은 저녁, 눈발이 날리는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수록됐답니다.

공영주차장 안 나무집이 보이는 위치에 섰을 때 뒤돌아 보세요

시인은 『싸락눈(오늘의 한국시인선집])』에 이어 『강아지풀(오늘의시인총서』, 『[백발의 꽃대궁(현대시인선]』 등 작고할 때까지 모두 3권의 시집을 출간하고 충청남도 문학상, 현대시학 작품상, 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하셨는데요. 시집 제목에서 엿보이듯 가난하지만, 작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노래한 향토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눈물의 시인'의 학창 시절은 뜻밖입니다. 전 과목 우등생, 미술에 재능 있는 미술 반장, 학교를 대표하던 정구선수, 전교생에게 구령하는 대대장, 수석 졸업생으로 이름을 올릴 만큼 적극적이고 통솔력 있으며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는데요.

고등학교 2학년 여름, 강 건넛마을로 시집간 누이가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나면서 완전히 달려졌다고 합니다. 어머니 같은 누나 손에서 자랐던 터라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의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셨나 봅니다.

이곳이 박용래 시인이 머물던 '청시사'였음을 알려주는 기념비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에 울지 않았고 애달픔에 울지 않았고 외로움에 울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한 것은

삶의 부질없음, 누리는 것의 덧없음, 헤어짐의 속절없음 따위,

인생의 유전에서 오는 삼재팔난이 아니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박용래 약전」 중, 이문구

『관촌수필』로 유명한 이문구 소설가는 "그는 그보다 술을 더 사랑하여 해거름녘의 두 줄기 눈물을 석 잔 술의 안주로 삼았다"라고 회고합니다. 서정주, 고은, 이문구 등 지금도 현대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인들은 대전에 올 때면 청시사에서 눈물의 시인과 술 한 잔씩 걸쳤다는데요. 당시에도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손꼽히던 박용래 시인은 왜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6년여에 걸친 연구 끝에 박용래 시전집』, 『박용래 산문전집』, 『박용래 평전』을 펴낸 고형진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는 "모더니즘, 리얼리즘 위주의 당대 문단에서 덜 주목받았지만, 박용래의 뛰어난 작품은 시대를 넘어 살아남았다"라며 그의 문학사적 위치를 제대로 살려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오류동에 '눈물의 시인'이 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 다 직장에 나가는

밝은 낮은 홀로 남아 詩 쓰며 빈집 지키고

해 어스름 겨우 풀려 친구 만나러 나온다는

박용래더러 「장 속의 새로다」 하니,

그렇기사 하기는 하지만서두 지혜는 있는 새라고 한다.

요렇처럼 어렵사리 만나러도 나왔으니,

지혜는 있는 새지 뭣이냐 한다.

왜 아니리요.

대한민국에서

그중 지혜 있는 장 속의 詩의 새는

아무래도 우리 박용래(朴龍來)인가 하노라.

「박용래」, 서정주

늘 "어둡기 전에 떠나야지" 했던 대로 시인이 한낮에 영면에 든 지 40년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비어있던 청시사는 2008년 공영주차장으로 바뀌었는데요, 반갑게도 지난 2021년, 중구청에서 박용래 시인이 세상을 떠나가 전까지 살았던 오류동 149-35 일원에 옛 집터 표지석과 기념비를 설치했습니다.

'눈물의 시인' 박용래 시인의 옛 집터 표지석에는 연보도 있습니다.

검은 돌로 만들어진 표석은 대로에 설치되어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데요. 안내판에는 시인의 사진, 소개글, 대표시, 연보 등이 담겨있습니다.

경주 가는 내내 그는 그렇게 툭하면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 박 시인에게 종이컵에 술을 따라 권했는데

한 모금 마시고 눈물을 흘렸고,

또 한 모금 마시고 눈물을 흘렸다.

기자의 눈에는 몸에 들어간 술이 곧바로 눈물이 되어 눈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 중, 정규웅

옛 집터 표지석은 생각보다 찾기 어려워서 골목을 빙빙 돌며 잠시 헤맸는데요. 알고 보니 공공주차장 안, H대리점 건물 바로 뒤에 있습니다. 기대보다 작아서, 기대보다 드러나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박용래 시인의 흔적이 오류동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지요.

박용래 시인의 작품이 담긴 그림책과 시집입니다.

살아서는 그의 작품을 모르던 이가 없고

죽어서는 그의 이름을 지울 이가 없을 터임에

세상은 그를 일컬어 시인이라 한다.

「박용래 약전」 중, 이문구

배추 씨처럼 살짝 흙에 덮혀 살고 싶다던 시인의 흔적은 보문산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정공원에 박용래 시인을 비롯한 지역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거든요.

박용래 시인의 작품은 시집뿐만 아니라 어린이 그림책으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최승호 시인이 엮은 그림책을 펼쳐보면 장닭, 민들레, 아가, 섬돌, 해님, 송아지, 호롱불, 여물, 강아지풀 등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의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을 예쁜 그림과 함께 음미할 수 있어요. 서점에서, 도서관에서 꼭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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