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여행] 조선시대 객사가 있었던 곳! 대가야역사공원& 대가야정
대가야시대부터 현재까지 오롯이 담은
대가야역사공원과 대가야정을 소개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대가야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으로 정남향으로 되어있습니만
조선시대 고령 객사는 100여 칸이었습니다.
대가야 왕도의 위세가 조선시대에도 이어진 것 같습니다.
고령 객사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대가야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합니다.
고령 객사는 조선 전기인 1493년(성종 24년)에 건립했는데
정청인 가야관과 동대청인 인빈각,
서대청인 전일헌 등 50여 칸 규모였습니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쳐 지었는데 1843년(현종 9년) 100여 칸 규모로 확장하였습니다.
1896년(고종 22년)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를 봉안하였으며
1909년 (순종 3년) 기능이 폐지되었습니다.
객사와 향교는 인근에 위치해 있었는데
고령향교도 객사 인근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령향교 대성전에는 25인 성현의 위패를 모셔놓고 예를 갖추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36위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향교에서도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 등에 제를 올렸고 지금도 예를 갖추고 있습니다.
고령은 대가야의 도읍지로 찬란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가야읍의 중앙에 자리잡은 수리시설과 대규모 남북수로가 조성되었고
조선시대의 고령 객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조선시대 때 객사에 와 누구든지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요.
지산동 고분군을 품고, 고령향교와 고령객사가 있었던
대가야 왕도 중심부에 위치해 삶의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대가야궁성지 등과 함께 당시의 생활 모습을 복원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잠시 조선시대 객사를 상상하며 잠시 대가야정에 앉아 지산동 고분군 왕릉을 바라보았습니다.
대가야역사공원이 작년에 조성될 때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기도 합니다.
지금은 지역민과 여행객들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쉼터로 광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대가야 왕도와 조선시대에 위상을 말해주듯 푸른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가고 있습니다,
대가야시대 남북수로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 위에는 고령의 역사를 적어 놓았습니다.
남북수로는 대가야궁성지 인근에 조성된 대가야시대의 인공수로입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규모는 길이 80m, 쪽 3~4m. 길이 2m 정도입니다.
대가야읍 북쪽의 우륵기념탑 쪽에서 내곡천의 물을 끌어들여, 대가야 읍내로 흐르도록 했습니다.
남쪽으로는 대가야 시장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북수로를 따라 거슬러 올라 가 고령의 역사를 더듬어 볼게요.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고령군이란 이름이 불러지게 되었습니다,
940년 고려 시대로 껑충 뛰어갑니다.
고려 태조 28년에 고령군이 경산부에 속하게 됩니다.
휘리릭 ~~~
1175년으로
고려 명종 6년에 고령군에 감무가 파견됩니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가 봅니다.
1413년 태종 13년 고령현에 현감이 파견됩니다.
현감이 거주하면서 객사의 필요성을 느끼고 80년 후 1493년 고령 객사가 지어졌습니다.
1896년 갑오개혁 후 행정구역이 경산부 고령군에서 경상북도 고령군으로 정식 명칭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그래서 경상북도 고령군이란 행정지명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행정구역 개편은 아니고 고령군만 대가야의 위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대가야읍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고령은 대가야의 도읍지로 찬란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요
고령군민과 고령을 찾는 모든 분께서
대가야시대부터 현재까지 오롯이 담은 대가야역사공원과 대가야정에서
마음의 평안을 가지며 쉬어 가시길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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