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지혜와 오늘의 삶이 어우러지는 '삼강려애각&이시직공 정려각'

송촌은 한마을에서 도학군자와 충신(忠臣), 효자(孝子), 효부(孝婦), 열녀(烈女) 모두를 배출한 마을로 조선왕조가 표방한 유교주의 국가 시책을 가장 충실히 실천한 마을이라고 합니다. 중리동에는 열부 고흥류씨 정려(烈婦 高興柳氏 旌閭)가 있고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죽창 이시직(竹窓 李時稷)의 충신 장려가 있습니다.

이를 널리 알리려 삼강려 애각 (上下 宋村里 三綱閭)을 새겼다고 합니다.

삼강려 애각 (上下 宋村里 三綱閭)

삼강(三綱)이란 임금과 신하(忠), 부모와 아들(孝), 남편과 아내(烈)을 말하는데 이 마을엔 이셋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국가에서 정문을 내린 인물이 살았다.

그러나 삼효자(三孝子)의 후손들이 송촌(宋村)을 떠나 대화동으로 이사 가면서 삼효자(三孝子)정문도 이전하게 되었다. (안내판 발췌)

19세기 중엽 이를 아쉬워한 송준길 선생의 8대손 송명노(宋明老)가 송촌동에서 중리동에 이르는 길(수박재) 바위에 상하 송촌리 삼강려(上下宋村里 三鋼閭)라 새겼다. 송촌이 상하(上 下)로 불리고 있다.

하촌(下村)은 배달촌(白達寸)인데, 쌍청당이 있는 곳이고, 상촌(上村)은 옛 만취(晩翠)란 마을인데 동춘당이 있는 곳이다. (출처: 은진송씨 대종회 홈페이지)

그러나 1994년 송촌지구 택지 개발사업으로 이곳의 원형이 훼손되어 옛 정취가 완전히 사라졌다.

대전광역시와 동춘당 종중에서는 이 마을의 전통과 정신이 잊히는 것을 아쉬워한 나머지 삼강려 애각(三鋼閭 涯刻)의 바위를 떼어내어 이곳에 보존함으로써 후인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충 · · 열(忠 · · 烈) 삼강(三綱)의 정신에 충실했던 마을이었음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한다. (안내판 발췌)

스토리가 흐르는 정려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동춘당 생애길 건너편에 '이시직공정려각' 문화재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시직 공은 회덕인으로 자는 성유(聖兪)이며 호는 죽창(竹窓)이다. 1572년(선조 5) 청암도 찰방을 지낸 이빈(李賓)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 임금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출처: 대덕문화원 문화유산)

소재지는 대덕구 송촌동 488-1로 1638(인조 16) 건립되었고 연안 이씨 죽창 공파 종중 소유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국가유산 검색)

'이시직공정려각'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죽창 이사직(1572~1637)의 충절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각입니다. 1994년 6월 7일 대전문화유산 제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내부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 천정으로 하고 네 모서리 추녀에는 가느다란 활주를 비스듬히 받쳐 처짐을 방지하도록 했다. 이 활주는 나중에 추가로 세운 곳이다. 건물 내외부에는 모루단청을 하여 화려한 모습이다. (출처: 대덕문화원 문화유산)

정려는 서향으로 건립되어 있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평면으로 구획한 후 네 개의 둥근 기둥 사이에 붉은 칠을 한 홍살을 두른 누각은 지붕은 겹처마 여덟 팔八) 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외벌 대로 만든 장대석 기단 위에 팔각의 주형 장초석을 세우고 원형 기둥을 세웠다. 사괴석(四塊石)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출처: 대덕문화원 문화유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들어갔는데 강화가 함락되자 묘를 파서 자결한 송시영(宋時榮)을 매장하고 노복에게 자기를 남은 묘 한곳에 매장하라고 한 뒤 자신을 활끈으로 목을 매 자결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종되었으며 ‘충목(忠穆)’이라는 시호와 함께 충신 정려를 받았다. 사면에 홍살을 두른 내부에 정려 편액이 걸려 있다. (출처: 대덕문화원 문화유산)

'이시직공정려각'은 대양 어린이 공원 내에 있는데요. 공원 앞 공영 주차장이 있어 차량을 이용해 방문하실 때 공영 주차장에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흥류씨 정려각 및 비 (高興柳氏 旌閭閣 및 碑)

류씨 부인은 쌍청당 송유의 어머니이다. 진사 송극기(宋克己)와 혼인하였으나 약관의 나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22세에 홀몸이 되었다.

유복자 송유와 함께 개성의 친정에서 살고 있었으나 가엽게 여긴 친정에서 재혼을 종용하자 재혼을 서두르자 한밤중에 아들을 데리고 500리가 넘는 시가가 있는 회덕으로 내려와 유 씨 부인은 시댁에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아들을 훌륭한 선비로 성장시켰다.

1452년(단종 즉위 년)에 세상을 뜨고 나서 약 200년 후인 1653년(효종 4)에 그의 정절을 그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구릉지에 주위를 담으로 에워싸고 그 안에 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정문 옆에는 1665년(현종 6) 동춘 선생이 비문을 짓고 우암 선생이 쓴 정려비가 서 있는데 정려를 받게 된 내력과 후대까지 정려를 보존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 대덕문화원 문화유산)

정면, 측면 각 1칸의 정려각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작은 규모지만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대로 외벌 대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을 놓은 다음 그 위에 8각 장초석을 세웠다.

초석이 높아지면서 자연히 기둥이 짧아졌다. 기둥은 원주를 사용했다. 기둥 상부에서 단면이 둥근 창방을 걸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렸다.

특히 기둥 사이의 공간포는 출목점차의 하단을 연꽃 주변선 모양의 곡선으로 조각하고 당초문양을 그려 매우 화려하다. (출처: 대덕문화원 문화유산)

"열부고려진사송극기처고흥류씨지각"이라는 큰 글자가 중앙에 쓰여 있으며 고흥류씨의 부인이 보여준 충절과 덕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고결한 인품과 행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정려는 앞면 1칸 옆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겹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4면에 붉은 살을 두른 내부에 명정이 걸려 있으며 공포는 무출목이익공 계통으로 구성하였고 창방 위에는 1구씩의 장화반을 놓았는데 이 화반은 밖 1출목 안 2출목으로 짜서 특이하다. 정려의 주변에는 사괴석 담장을 쌓았다. (문화재청 국가유산 검색)

고흥류씨 정려각은 고려 시대의 이야기와 함께 고흥류씨의 행적을 기르는 곳입니다. 이곳은 1996년에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고려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정려각 주변에는 작은 놀이터와 재래시장이 있어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것 같습니다. 고흥류씨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에게 삼강려애각과 이시직공 정려각 방문은 특별한 경험이 될 것 입니다.

과거의 지혜와 오늘의 삶이 어우러지는 이곳에서 우리 역사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껴 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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