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홍씨 장민공 홍숙(洪淑) 묘와 신도비
안녕하세요~
양주시 SNS 시민서포터즈입니다.
겨울엔 역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야 제맛인 것 같아요.
기록적인 첫눈을 시작으로
양주에도 눈이 자주 내릴 것 같아
기대되는 올겨울입니다.
제가 홍숙 묘를 찾았을 때도
하얀 눈이 가득해서
멋진 설경을 감상할 수 있었어요.
제가 찾아간 홍숙 묘는
양주시 장흥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 문신의 묘입니다.
좌찬성 남양 홍씨 장민공
홍숙 묘역은 수려한 경관의
사패산 자락에 위치합니다.
묘역은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고,
신도비는 그 아래에 우뚝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어 멀리서 봐도 묘역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묘역으로 가기 전에 재실이 있어
들러 봤는데, 출입문은 잠겨 있어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재실 앞의 작은 연못에 비친
재실의 모습이 운치 있게 보였어요.
장민공 묘역에 있는
남양 홍씨 후손들의 묘 위치입니다.
장민공 홍숙과 그의 후손들을
이곳에 모셔 약 500여 년 동안 봉향했으며
2003년 6월에 재실인
추원재(追遠齋)를 건립하여 추모의 마음을
극진하게 하고 있습니다.
재실을 돌아 공의 신도비와 묘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때마침 내린 눈으로 겨울 정취가
더욱 깊게 느껴지네요.
장민공 홍숙의 신도비
장민공 홍숙의 묘로 올라가는 입구에
신도비가 있어 살펴보았어요.
신도비에는 장민공의 생애를 적어 놓아
장민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장민공 홍숙(1464년, 세조 10) ~ 1538년(중종 33)은
조선 중기 중종대의 문신입니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부(純夫)이고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원사 홍익생(洪益生)이며,
아버지는 홍귀연(洪貴演)입니다.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한 뒤
1496년(연산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1501년 정언·부수찬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파직당했다가 이듬해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에 기용되었습니다.
중종반정에 가담하였고,
좌승지로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추성정난공신(推誠定難功臣) 3등에 책록,
당원군(唐原君)에 봉하여졌습니다.
1508년 호조참판을 거쳐,
대사헌·경기도관찰사·우참찬을 지낸 뒤
1517년 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이 되었습니다.
이어 형조판서로서
조광조(趙光祖) 등을 심문 뒤
국가를 위하는 그들의 절의 정신을
오히려 높여야 한다고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고,
1533년 궤장(几杖)까지 하사받았으나,
이해 김안로(金安老) 일당이 날조한
작서지변(灼鼠之變)에 연루되어
삭직된 뒤 과천으로 추방되었다가
1538년 복관되었습니다.
공은 전고(典故)에 밝아 정치를 함에 대체
를 잃지 않았고,
스스로의 몸가짐에 있어서도
엄정하면서도 관후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효성이 돈독하였습니다.
시호는 장희(莊僖)입니다.
병신년(丙申年, 1536년 중종 31년) 가을에
모부인 상을 당했는데 이때 공의 나이가
70을 넘었으나 집상(執喪)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건강을 잃었습니다.
또한 맏아들이 멀리 귀양을 가게 되자
다시는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하여
근심한 나머지 병이 되어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년)
정월 4일 복중(服中)에 졸하니,
수(壽)는 75세였습니다.
이해 3월 24일에
양주(楊州) 도봉산(道峰山)
울도(鬱陶) 을좌 신향(乙坐辛向)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민공 홍숙은
현령(縣令) 안극치(安克治)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이 중 아들 홍서주는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옛사람의 묘역을 탐방하고,
생애를 공부하면서 삶의 지혜를
배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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