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름 피아니스트·동구 출신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의 <바다:La Mer>라는 작품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바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3개의 교향적 스케치>이며, 바다 위의 새벽부터 한낮까지, 파도의 유희, 바람과 바다의 대화 이렇게 세 악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음악을 들어보면 바다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판타지적 요소가 총망라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인데 이건 드뷔시가 추구하던 인상주의라는 음악적 색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실제 바다의 모습보다는 바다를 그린 그림과 문학 작품으로부터 더 많은 영감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드뷔시가 살았던 세기말 파리는 혼돈과 시도가 뒤섞인 다가올 20세기,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준비하던 과학과 기술의 시대였으며 또한 새로운 것들이 과감하게 표현되는 강력한 예술적 시기였다. 거대한 에펠탑이 세워졌고, 기차와 전철이 운행을 시작했으며 백화점도 들어섰다. 새롭고 깨끗한 파리를 위한 대대적인 도시 정비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더욱더 도시의 뒤편으로 밀려나게 만들었지만 그들의 예술은 더욱더 강력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새로운 예술적 흐름을 인상주의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이전의 전통적인 회화 기법이었던 사실적인 묘사와 균형미를 벗어나, 빛과 색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순간의 인상을 아름답게 포착하는 것으로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등 많은 화가들이 추구했으며 이러한 미술사조에 영향을 받은 드뷔시가 음악의 인상주의를 창시한 것이었다. 그래서 드뷔시의 음악은 정확한 형체가 없듯 모호하고 몽롱하며 하늘에 붕 떠다니는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음악이다.

또한 그 당시 파리는 야포니즘(재페니즘)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일본에서 수입해 들어오던 도자기를 싼 종이에 그려진 우키요에(일본의 풍속화)를 시작으로 만국박람회 때 전시된 일본의 우키요에들은 파리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모네는 일본식 정원을 화폭에 담았고, 고흐는 일본의 우키요에를 모사하며 자신의 그림에 그 그림들을 담았다. 그리고 드뷔시 역시 이런 동양적인 음악적 화성을 작품에 사용하며 더욱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바다>라는 작품 또한 일본의 화가 가쓰시가 호쿠사이(1760-1849)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라는 그림에서 영향을 받다 보니 더욱 신비한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드뷔시가 표현해낸 바다는 신비한 전설을 가득 담은 시공간을 초월한 바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나에게 바다는 신비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강력한 산업화가 이루어진 어촌에 새롭게 만들어진 공장 도시에 살던 소녀였다.

내 시야 속의 바다는 대형 크레인과 공장, 똑같은 점퍼를 입은 수많은 오토바이 부대들이 함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런 동구의 모습들이 더 신비로울 따름이다. 유학시절 가끔 친구들이 현대 제국에서 온 소녀라고 불렀을 정도니 바다와 공장은 나에게 늘 함께였다. 하지만 귀소본능 같은 게 있는 걸까? 그런 신비로움을 가득 담은 바다가 아닐지라도 바다가 없는 곳에서 유학하던 시절 늘 바다가 그리웠으니 말이다.

세월이 지나고 멀리서 바라보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동구의 조금 다른 낯선 분위기가 사람들에게서 거리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편안하게 느껴진다. 지금은 세기말 파리의 모습처럼 동구의 변화기라고 생각한다. 슬도아트와 문화공장 방어진이 개관하고 동구에 맞는 문화들이 새롭게 자리 잡고 뿌리를 내려 강력한 예술적 발전의 시기가 찾아올 수 있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기대하며... 어릴 적 나와 같은 소녀들이 신비한 바다를 꿈꿀 수 있기를...

※ 2024년 대왕암소식지 여름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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