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수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

때는 지난 4월 2일 오후. JW메리어트 호텔 서울 3층에서는 신동와인 더헤리티지 2024 시음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가장 비싼 와인은 헝가리의 명품 스위트 와인 로얄 토카이 에센시아 2009 빈티지였다. 일반 와인의 절반 용량인 375mL 한 병이 약 150만 원에 이르는 귀하신 몸이다. 오후 세 시 정각에 선착순으로 줄을 서서 소량을 제공받았는데 뒤늦게 줄을 서다 보니 앞줄 세 팀 정도 남아있는 상황에서 준비된 한 병이 소진되었다.

한방울 남은 와인까지 톡톡 털어 마시고 있는, 와인에 몹시 진심인 임승수 작가 (사진제공 임승수)

아쉬움에 돌아선 지 30분쯤 지났으려나. 문득 로얄 토카이 에센시아의 점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바닥에 조금은 고여있지 않을까 예상하며 빈 병이 놓여 있는 곳으로 갔더니 역시 극미량이 고여 있다. 즉시 병을 부여잡고 뒤집어 주둥이를 입 위로 가져갔다. 과연 혓바닥 위에 떨어지는 방울만으로도 절륜한 기량을 가늠할 수 있었다. 향기롭고 눅진한 계피 향, 단맛과 산미의 완벽한 균형감, 한지에 먹이 스며들 듯 혀 위에서 운치 있게 번져나가는 방울 방울의 묵직한 존재감. 조금만 더 지속하면 열 방울을 채울 수 있겠건만 너무나 남루한 행동 같아서 도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흘이 지난 4월 5일 오후. 장소는 JW메리어트 호텔과는 대척점에 있는 나의 주 서식지. 눈앞에는 로얄 토카이 에센시아 2009 몸값의 약 2%에 불과한 이탈리아 와인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제나토 리파사 발폴리첼라 리파소 수페리오레 2018. 고급 와인인 아마로네(Amarone)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재활용해 만들었단다. 바로 옆에는 주문한 찐만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심해서 강을 건널 수 없자 물의 신을 달래기 위해 인신공양 제사를 드리는데, 사람 대신 만두를 사용했다고 하지 않나. 찌꺼기(발폴리첼라 리파소)와 대용품(만두)의 조합은 시작부터 B급 독립영화 분위기구나.

딸내미 주먹만 한 만두 하나를 집어 들어 반쯤 베어 물어 씹는다. 두툼하고 존득한 만두피를 찢고 들어가니 향긋한 부추와 두부, 돼지고기 등의 단백질이 어우러진 만두소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반겨준다. 이 집 만두는 특히나 부추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게 참으로 만족스럽다. 하지만 부추가 아무리 제 역할을 하더라도 두부나 고기에서 유발되는 잡내를 완벽히 잡아내기는 어려운데, 찌꺼기 와인의 과실 향 가득 찬 풍성한 신맛은 마치 전문 청소팀과도 같아서 잡내 뿐만 아니라 카오스 상태인 구강 내부를 말끔하고 상쾌하게 정돈한다. B급 독립영화관에서 간만에 명작을 찾아낸 것과도 같은 만족감이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비싼 와인이 맛있는 건 사실이지. 그동안 시음회에 줄 서서 극소량을 영접한 값비싼 녀석들은 하나같이 끝내줬으니까. 하지만 나와 아내가 주방 식탁에서 두 시간에 걸쳐 도란도란 마시고 있는 이 한 병의 와인은 우리와 훨씬 진중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가. 인간관계 또한 그러해서, 권력자나 명망가와의 스쳐 지나가는 만남보다는 가족, 동창생, 평범한 이웃과의 은근한 오랜 인연이 더욱 소중하기 마련이다.

길에서 연예인 급 미모의 여성을 봤다고 갑자기 아내보다 더 사랑할 리는 없다. 남의 집 아이가 전교 1등 한다고 내 아이보다 예쁠 리 없다. 멋진 콘서트홀에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연주한다고 한들, 동네학원에서 고사리 손으로 연습하는 딸아이의 서툰 피아노 연주만 하겠는가. 마찬가지다. 이 순간 우리 부부와 소중한 인연을 맺는 3만 원대 와인이 그림의 떡과 같은 값비싼 와인보다 심장에 남는 것은 당연지사다.

※ 대왕암소식지 2024년 여름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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